정기검진과 치실

#19. 소박하지만 소담한 일상

by 도슨트 춘쌤
162p,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판도라, 1896..jpg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판도라>, 1896.


여인이 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그녀가 연 상자에서 무엇인가 빠져나오는 것이 보인다. 이 그림은 워터하우스가 그린 <판도라>이다. 판도라는 그림 속 주인공 이름이다. 그리스-로마 신화 속 이야기에 등장하는 판도라는 인류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제우스가 선물로 준 상자(항아리)를 보고 갈등한다. 하지만, 결국 상자를 열고 그 안에 있는 욕심, 시기, 질투, 질병들을 세상에 나가도록 만들어 버렸다. 이 그림이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바로 치과를 갈 때다.

제우스가 절대 열어보지 말라고 했던 판도라의 상자. 나에게는 제우스가 치과의 사이며, 판도라 상자는 초콜릿 봉지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확실히 판도라의 후예가 맞다. 선조가 했던 과오를 그대로 따라 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판도라가 열어 버린 상자로 인해 세상이 불행해졌듯, 나는 초콜릿 봉지를 열면서 충치를 마주해야 했다. 이것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정기검진 덕분이다.

항상 그렇듯 정기검진은 걱정을 선불로 지불로 요구한다.

어디 치아가 안 좋은 것은 아닐까?

돈이 많이 드는 것은 아닐까?


특히나 나는 치아 뿌리가 약해, 평소에도 치아 관리를 잘해야 했지만 30대 초반까지는 누구나 그러듯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 결과 충치의 판도라 상자가 열렸다. 충치 4곳, 사랑니 4곳. 무려 8곳을 손봐야 했기 때문이다. 금액적인 손해는 글로 쓰지 않겠다. 치아에 이어 마음까지 아파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상자를 연 판도라처럼, 나는 표정이 어두워졌고 과거의 날 탓했다. 치과의사는 나에게 치아 관리를 정말 잘해야 한다며, 신신당부한다.

"1년에 꼭 두 번 정도 스케일링하세요.

고객님은 치아가 남들보다 잇몸에 깊게 박혀있지 않으니 꼭 치석을 제거하셔야 합니다. “

그 이후로 나는 치실을 사서 매일 사용하고 있다. 물론, 달달한 초콜릿과도 ‘손절’했다. 덕분에 나는 지금은 더 이상 충치가 생기지 않고 있다. 꾸준한 치실 사용 덕분이다.


마음도 치석이 쌓이면, 충치가 생기는 것 같다. 마음의 판도라 상자가 열리면, 욕심과 질투, 시기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리고 마음의 충치가 생기고 마음은 썩는다. 그래서 마음의 치실을 꾸준하게 사용해야 한다. 치석이 생기지 않도록 말이다. 사소한 마음속 불만들, 시기, 질투, 욕심을 내버려 두지 말자. 그날의 마음속 치석들은 치실로 제거해야 한다.


162p, 김정희, 세한도, 1844. 두면 화면 확대.jpg

김정희, <세한도>, 1844



마음의 치실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바로 김정희의 <세한도>이다. 김정희는 55세의 나이에 8년간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모든 이들에게 잊혔던 유배객 김정희를 챙겨준 것은 중인 출신의 이상적이었다. 세 그루의 측백나무와 한 그루의 소나무, 푹 내려앉은 집 한 채 속에서 김정희는 이상적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았다. 김정희는 유배생활을 통해 세상에 대한 분노를 예술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 치실은 추사체이자, <세한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만의 치실은 ‘반신욕’이다. 하루가 끝나는 밤 10~11시. 나는 반신욕을 하며 마음의 치석을 제거한다. 노래를 듣고, 책을 보며 하루를 돌아본다. 덕분에 마음의 치실이 제법 단단해졌다. 아직은 더 많은 치실이 필요하다. 이 치실을 찾는 것 자체가 삶을 더 의미 있게 만드는 순간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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