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시.
내 눈의 숙명이다.
안경을 벗으면,
세상이 흐릿하게 보인다.
때론,
세상이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 비틀 거리는 것 같다.
안경을 벗으면
불안했다.
세상이 항상 흔들려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불안을 붙잡고자,
나는 안경을 쓰고
산책을 나갔다.
하지만
마스크를 계속 끼다 보면,
안개가 안경을 점령군처럼 차지할 때가 있다.
오늘의
내 안경이 그렇다.
세상이 뿌옇게 보였다.
그래서
안경을 벗었다.
차라리 벗고
러닝을 하자!
안경을 벗고 러닝을 하다가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되었다.
내 눈의
초점이 흐려지면서,
불빛들이 번져갔기 때문이다.
안경을 낄 때는 몰랐던
또 따른 세상이다.
안경으로 바라봤던 세상과 전혀 다른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빛들이 번지면서
내 눈의 망막을 자극했다.
흡사,
휘슬러의 그림처럼 말이다.
녹턴.
검정과 금빛의 녹턴.
떨어지는 불꽃을 형상화한 이 그림은
많은 평론가들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
당대 유명한 평론가였던
러스킨은 이것은 그림이 아니라 물감을 뿌린 쓰레기며,
돈을 받고 전시하는 것은 사기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화가 난
휘슬러는 그를 고소했고,
결국 휘슬러는 재판에서는 이겼지만 파산하고 말았다.
휘슬러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순간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림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그림이 그 어떤 불꽃놀이 그림보다
좋다.
희미한 경계와
번진 물감의 만남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항상 실수와
고민 속에서 방황하는 나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눈이 아닌, 마음을 보는 그림이란 생각이다.
오늘 그 마음으로만 바라봤던 이 그림이
내 눈에 보였다.
더 잘 보기 위해 쓰는 안경을 벗어야만
볼 수 있는
세상을 그대로 그려낸 것 같았다.
만약 러스킨을 만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내 눈으로 본 것과 너무 똑같은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분명 구상적인 그림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물감을 뿌린
쓰레기일지 모르지만,
도리어
자신의 쓴 안경을 벗고
오롯이 바라보면
내 마음을 위로해 주는 훌륭한
그림으로 바뀐다.
가끔,
내가 옳다고 믿는 안경을 벗어보자.
도리어
그 안경에 낀 것들이
현실을 호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