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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home, house

by Murk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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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거 스튜디오 수업에서 ‘House of Future’ 라는 해외 공모전을 본 적이 있다. 이 경험은 나를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이고 친숙한 공간인 ‘집’에 대해 깊이 고찰하게 만들었다. 당시 수상작들을 보면서 ‘집’을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 체감할 수 있었는데, 그때 떠올랐던 이미지들은 지금도 선명하다. 어떤 이는 집을 가장 사적인 공간으로 해석했다. 그 다음 집을 무대 위 세트장처럼 꾸며 타인의 시선 속에 존재하는 정반대의 공간으로 표현했다. 또 어떤 이는 집을 고양이의 영역표식처럼 이해해 천으로 덮은 구조물로 단순화했고, 또 다른 이는 잠자고, 먹고, 씻는 행위를 일종의 의식처럼 바라보며 최소한의 가구만 남긴 의식의 장소로서 집을 만들었다. 누군가는 집을 온갖 물건을 모아둔 창고처럼 정의해 희귀한 것들로 가득한 고물창고를 제안하기도 했다.

이처럼 건축의 카테고리 중 ‘집’은 가장 익숙하면서도 손대는 순간 계속 그 형태가 변화하는 낯선 공간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집을 어떻게 새롭게 정의할 수 있을까? 결국 사전에 이미 정해진 정의를 제외하고 나름의 해석을 내리려 한다면, 그것은 철저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되 집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 Home

나는 어릴 적 부모님께서 집을 나설 때마다 꼭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를 하라고 가르치셨다. 그 습관 덕분에 집은 언제나 ‘다시 돌아와야 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무의식 속에 자리 잡았다. 만약 지구상 어딘 가에 확실한 좌표점이 없다면, 우리는 방향을 잃고 헤매기만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집은 우리가 방황하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기준점이자, 삶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는 안식처다. 그래서 ‘집’은 단순히 소중한 것을 넘어, 우리 존재를 지탱해주는 가장 근원적인 공간을 빗댄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House

집은 단순히 머무는 껍데기 같은 주거 공간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쉴 수 있고 그리운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곳이다. 의식주의 ‘주’라는 단순한 기능을 넘어, 우리 심리에 깊이 작용하는 근본적인 공간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런 의문도 생긴다. 소라에게 소라 껍데기가 과연 본질적으로 의미가 있을까? 사실 ‘house’라는 단어로 집을 설명하려고 하면 곤란 해진다. 그렇게 구분하는 순간 ‘집1’, ‘집2’처럼 단어가 이원화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집은 본질적으로 이중적인 속성을 지닌다. Home으로 접근할 때는 다소 뻔하고 평범해 보이지만, House와 결합해 생각하면 모순과 복잡성이 드러난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집이라는 개념이 가진 이중성과 역설을 발견했다.


푸코가 말한 그 곳, 헤테로토피아

이제 home과 house를 함께 놓고 보면, 집이라는 단어가 가진 이질성과 공존의 성격이 드러난다. 이는 철학자 미셸 푸코가 말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 개념과 맞닿아 있다. ‘헤테로’(다른, 낯선)와 ‘토피아’(장소)가 결합된 이 단어는 일상 공간과는 대립되면서도 동시에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서로 다른 성격의 장소들이 중첩된 공간을 뜻한다. 푸코의 설명에 따르면 헤테로토피아는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다양한 장소성을 한 공간에 겹겹이 쌓아놓은 것과 같다.

집 또한 이와 비슷하다. 집은 물리적인 인간의 몸과 추상적인 정신이 분리될 수 없듯, house와 home이라는 상반된 두 얼굴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중적 공간이다. 이는 인간의 실체가 정신에 있는가, 신체에 있는가?라는 본질적인 물음과도 맞닿아 있다. 그렇기에 나는 집을 수수께끼 같지만 강력한 푸코의 헤테로토피아 개념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집은 가장 친숙한 듯하지만 그 안에는 늘 낯섦과 모순이 공존한다. 어쩌면 바로 그 역설 속에서 집은 우리 삶의 기준점이자 끝없이 새로운 해석을 낳는 공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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