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하고 일주일 만에 우리는 지자체 한달살기에 도전했다. 우리가 정착할 곳을 찾아본다는 명목이었지만, 사실 그보다도 지자체에서 숙박비와 체험비 등을 지원해 준다는 콩고물이 더욱 탐이 나서 시작하게 됐다. 그렇게 시작된 첫 번째 여행지는 서산. 태어나서 처음 땅을 밟아보는 서산은 서울의 센트럴시티에서 1시간 50분 거리에 있는 곳으로, 왼쪽으로는 태안 바다가 오른쪽으로는 천안/아산이 지키고 있다.
숙소에 도착해서 우리는 여행고수의 면모를 뽐내여 한 달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쓰윽 스캔해 본다. 다행히 호스트분이 손이 크신 건지 뭐든 다 많이 구비해 두셨다. 휴지도 대량, 세제/샴푸 같은 생활용품도 넉넉히 있어 특별하게 생활용품을 살 필요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뚜껑이 있는 냄비가 없다. 비상이다.
왜 그냥 냄비도 아니고 왜 뚜껑 있는 냄비가 필요한 걸까? 대단한 이유가 있을 것 같지만, 그저 밥을 짓기 위해서다. 단기여행이라면 외식으로 다 때우거나 밥이 필요하다면 햇반을 돌려 먹을 수 있지만, 우리와 같이 장기여행자에게 햇반으로 연명하는 것은 굉장한 사치이다. 그렇다고 밥솥을 들고 다니기에는 부피가 커서 이동이 어려워진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에게는 언제부턴가 뚜껑 달린 냄비가 필수 아이템이 되어버렸다.
어쩔 수 없이 근처 마트에서 뚜껑 있는 냄비를 구매하고 집으로 돌아와 능숙하게 냄비밥을 짓기 시작했다. 그리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음.. 1년 간의 세계여행 중 가장 많이 배운 것은 냄비밥이 아닐까?"
1년의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도 만났지만, 많은 냄비들도 만났다. 코팅이 다 벗겨져 밥을 짓는 족족 다 타버리는 냄비가 있는가 하면 인덕션 위에서 열기를 못 버티고 깨져버린 냄비도 있었다. 냄비만큼이나 다양한 쌀들도 만났다. 아무리 오래 불려도 설익는 쌀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물을 많이 넣어도 날리는 밥이 되어버리는 쌀들도 있었다. 또 화구는 얼마나 다양한가. 인덕션, 전기레인지, 가스레인지.. 까지..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떠한 형태의 냄비, 어떠한 형태의 쌀, 어떠한 형태의 화구를 만나도 밥을 잘 지을 수 있는 능력(?)이 생겨 버렸다. 서산에서의 첫 냄비밥도 역시나 완벽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새로 산 냄비인 데다가 세계에서 최고의 쌀인 한국쌀이 만났고, 거기에 1년 간 냄비밥을 수련한 우리가 집도를 했으니 완벽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혹자는 거창한 제목에 비해 배워 온 것이 너무 하찮아서 허무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만 하더라도 1년 간 세계여행을 하고 나면 막 대단하고 엄청난 것들을 배우고 깨달을 줄 알았다. 그러나 예상보다 대단한 변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저 우리의 삶에 확신이 생긴 것 쯤?그래도 냄비밥 잘 짓는 능력 하나라도 배워 온 게 어디랴. 나중에 캠핑을 가게 되면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