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소비 기록 [문화 일기 2021] 11월 호 - 영상 편
완전한 연말이 다가오기 전에, 후다닥 문화 일기 11월 호를 써보려고 한다.
문화 일기에서는 영화와 드라마, 책과 음악까지 소개하기 때문에 한 포스트로 엮으면 글이 너무 길어져서, 보통 영상(영화, 드라마) 편과 글과 노래 편으로 나누어 게시하는데 이번에는 영상 편 길이가 유독 짧을 것 같다. 이상하게 요즘 들어서 드라마 한 편을 진득하게 보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드라마 하나에 꽂히면 그걸 정주행 끝나기 전까지는 다른 영상을 잘 안 보는, 마치 도장 깨기 하듯이 보는 사람이었는데 11월에는 계속 한 드라마나 영화를 참을성 있게 보질 못하도 이것저것 다른 것들을 기웃거렸다. 그래서 결국 다 본 게 거의 없다. 3화 즈음에 재생 바가 멈춰 있는 드라마들만 있을 뿐이다. 보통 그때쯤 되면 이제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슬슬 시련을 겪기 시작하는데, 그걸 보기가 힘들다. 문제는 이거다.
드라마든 영화든 결국엔 하나의 큰 이야기이고, 이야기가 구성되기 위해서는 응당 사건이 있길 마련이며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시련을 겪거나 고난과 역경에 처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갈등 유발인데도 그걸 보기가 힘들다. 그래서 주인공이 조금이라도 위험에 처하거나, 어려움에 몰리면 재생 창을 끄게 된다. 대체할 콘텐츠는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OTT의 장점이자 단점이지 아닐까 싶다. 콘텐츠를 인터넷 창 넘기듯 쉽고 가볍게 고르고 바꿀 수 있다는 점이 말이다.
변명은 이쯤에서 줄이고, 그래도 나의 11월을 함께해준 영화와 드라마 몇 편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1. 십일월의 영화
-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2020)
2017년에 시작되어 아직도 전 세계적으로 진행 중인 미투(#MeToo) 운동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는, 2016년에 일어난 폭스뉴스 성폭력 해고 사건을 다룬 실화 기반 영화이다. 해고당한 그레천이 CEO 로저 에일스를 상습적 성희롱으로 고소하면서 사건이 알려지게 되고, 이를 보고 연대하기로 마음먹은 다른 피해자들이 하나 둘 자신들의 피해 사실을 증언하면서 결국 로저 에일스는 해고당하게 된다. 짜릿한 복수극이라는 캐치 프레이즈와는 달리, 실화 기반 영화다 보니 결말은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폭스는 성폭력을 저지른 로저에게는 퇴직금 명목으로 약 6천5백만 달러를 지불하는 반면에, 성폭력 피해자들에게는 5천만 달러를 지급했다. 가해자에게 약 1.3배 더 많은 금액을 지불한 것이다. 퇴직금이라는 명목 아래에 명예까지 지켜주면서 말이다.
너무나 현실적이다.
영화에서도 그레천의 고소 이후 혼란스럽고 아슬아슬해진 폭스 내부의 분위기를 잘 담아내었는데, '팀 로저' 티셔츠를 만들어서 응원하는 의미에서 입으라고 돌리는 사람도 있고, 그(로저) 덕분에 방송에 나올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거라며 폭로하려는 사람들에게 은근한 압박감을 주는 여성도 나온다. 성희롱을 폭로하려는 메긴에게 그 사실을 폭로하고 나면 여기에 남아 있어야 하는 자신들은 어떡하냐는 식으로 나오는 사람들도 있다. 그저 성공하고 싶었을 뿐인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에 몰아넣고 다리를 보아야 하니 치마를 더 짧게 걷어보라는 둥, 충성심을 (성적인 행위로) 보이라는 말 따위를 하며 '권력형 성범죄'를 일으킨 가해자는 따로 있는데도 그들은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사람들은 날카로운 시선을 보낸다.
그 숨 막히는 분위기가 스크린을 넘어서 전해졌다. 순백의 피해자는 존재할 수 없으며, 생계가 걸린 문제에서 피해자가 범죄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혹은 범죄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에서는 피해자들은 입을 닫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를 검열하게 된다. 영화 속 메긴이 성희롱 피해 사실 증언을 고민하면서 내뱉은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그 사실을 말하는 순간, 자신은 여기(폭스)서 가장 약자가 된다고. 성폭력 피해자라는 약자 말이다. 이 대사에 담긴 마음이 어떤 것인지,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범죄의 피해자들과는 다르게,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은 '성'의 카테고리에 초점이 맞추어진다고 느껴진다. 개인적인 생각이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성이 부끄러운 것 혹은 숨겨야 할 것으로 다루어지는 편이다 보니, 피해 사실을 입었다고 말하는 것조차도 힘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말하는 순간 '성폭력 피해자'라는 꼬리표가 달라붙을 것이라는, 그렇게 정의될 것이라는 불안이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으로 그렇기에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데도 어려움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타인의 일이라면 진심으로 대신 분노해주고, 위로해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인의 일이 된다면, 수없이 그 상황을 마음속에서 반복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앞서 언급했던 순백의 피해자라는 프레임의 그 상황을 끼워 맞추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았으면 한다. 자괴감에 빠지지 말고, 자의적 선택이 아니었음을 깨달으며 자신을 챙기면서 대응하기를 바란다. 사실 영화 속 그레천과 메긴처럼 피해 사실을 증언하고 고소에 동참하며 다른 피해자들과 연대를 이루고 힘을 보태는 것은 아주 용기를 내야 하는 행위이다. 물론 이런 행위로 인해 세상이 바뀌고 미투(#MeToo) 운동 같은 거센 물결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다고 해서 스스로를 다그칠 필요는 없다. 그저, 자신을 잘 챙겼으면 한다. 일상의 행복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오기를.
2. 십일월의 드라마
- 저, 정시에 퇴근합니다.(2019): 정시 퇴근이 이렇게 힘든 거였나요...?
요시타카 유리코 원톱 주연의 오피스 물이다.
정시 퇴근 후, 회사 근처 중화요릿집인 상하이 반점에서 해피아워에 반값으로 맥주를 마시고 만두를 먹는 게 낙인 히가시야마 유이에게 새로운 부장과 부부장이 나타난다. 새로운 부장은 정시 퇴근하는 유이를 아니꼽게 바라보며, 팀원들에게 일이 생길 때마다 유이에게 팀장이 정시 퇴근을 하니 신경을 못 써서 그런 게 아니냐며 꼰대 발언을 하는 싸한 모습을 보여주고, 부부장은... 일중독인 유이의 전 파혼남이다.
정시 퇴근이라는 자신의 신념은 지키되, 남에게 피해 주는 것 없이 효율적으로 일을 잘하는 유이에게 후배가, 선배가, 동료 직원들의 일이 생기고 이 모든 걸 꼰대 부장은 아니꼽게 바라보며 유이에게 정시 퇴근을 꼬투리 잡곤 한다. 거기다 일중독인 전 파혼남 코타로(부부장)와 완벽히 대비되는 가정적이고 다정한 현남친과의 관계도 코타로의 등장 이후 조금씩 꼬여가는 느낌이 든다.
아직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해보지 않아서일까? 정시 퇴근한다고 유이에게 눈치 주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드라마 속 유이가 근무하는 회사인 넷 히어로즈는 야근을 지양하는 소위 말하는 '깨어있는'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새로 온 직원이나 부장이 정시 퇴근과 사유를 물어보지 않고 연차를 허용해주는 것에 꼬투리를 잡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퇴근 가지고 유이에게 눈치를 주지만.. 시청자인 나의 입장에서 봤을 때 가장 사내 사회생활을 잘하고 인간관계는 물론 일까지 잘하는 건 유이뿐이었다.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비즈니스 일본어를 공부하기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회사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에, 여성의 경력단절, 직장 내 권력형 성폭력 등의 사회 문제도 함께 다루어서 좋았다. 특히 취업이 힘들던 시기에 취직한 선배들과 그렇지 않은 후배들 간의 세대차이라고 할까. 소위 말해 요즘애들 vs 젊은 꼰대 사이의 갈등을 녹여낸 부분이 기억에 남았다. 후배에게 30분 전에 일찍 출근해서 일을 배우라는 둥의 꼰대 발언을 한 미타니와, 기분 나쁘다고 중요한 자료가 들어 있는 미나티의 노트북 비번을 바꿔버린 채 회사를 그만두고서는 미타니가 무릎 꿇고 사과하기 전까지 못 알려준다던 후배 에피소드가 인상 깊었다. 자기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은 채 상대방의 잘못에는 극단적인 '참교육'을 시켜줘야 한다는 요즘 사회의 풍토가 일본에도 있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 천관사복: 천관사복 백무금기(천관이 복을 내리시니 근심할 것 하나 없다.)
내가 또. 진정령에 이어 또다시 중국 (종이) 남성들의 사랑에 빠져버리다니.
동명의 중국 bl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이다. 현재 1기까지 제작되었고, 2기가 제작 중이며 1기에서는 본격적인 사건이 진행되기보다는, 도입부와 같은 느낌이라 시작도 전에 모두 끝나버린 느낌이 들 수도 있다. 내용은 선락국의 태자 사련(흰옷)이 천계에 세 번째로 등선 하는 과정에서(두 번 짤림) 다른 신들의 궁 등이 무너져버렸고 이를 갚기 위한 공덕(공덕으로 갚음)을 쌓기 위해 인간계로 내려가 여러 사건들을 해결해준다. 이 여정에서 박학다식하고 친절하며 자신을 와주는 삼랑(빨간 옷)을 만나 함께하게 된다.
처음에는 아무런 정보 없이 추천받아서 보기 시작했는데, 점점 뭔가 묘한 대사나 분위기가 연출되기에 '뭐야 얘네 이거 사랑 아니야?' 했는데 진짜였다. 그것도 몇백 년을 기다린 순애와 존경과 경애가 뒤섞인 사랑. 진정령 원작 마도조사의 작가 묵향동후의 작품이다 보니 둘 캐릭터에서 마도조사 캐릭터가 살짝 겹쳐 보이긴 했다. 개인적으로 사련은 위무선에서 욱하는 성질을 빼고 착함과 선함을 넣은 느낌이어서 좋았다. 진정령을 재밌게 본 사람이라면 천관사복 역시 취향에 맞을 것 같다.
11월의 문화 일기는 금방 올리겠다고 해놓고서는 이렇게 또 늦게 올리게 되어 민망한 마음뿐입니다..
글과 노래 편은 정말 곧 들고 올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