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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심삼일 글쓰기 Nov 17. 2019

#5. 인도네시아에도 필요한 김영란 법


알리민 박사님과 나


아무리 느긋해도 출근은 해야지...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성격이 온순하고 일하는 속도가 느렸다. 아마도 더운 기후 때문에 조금만 움직여도 지치기 때문에 그것이 성격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온순한 성격은 때로는 답답하다 못해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빨리 빨리를 좋아하는 한국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서일까. 이곳에서는 인터넷이나, 전화, 수도가 고장 나서 전화를 걸더라도 1주일은 지나야 수리기사가 도착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약속을 해도 1시간은 넉넉히 생각해야 되고, 심지어 말도 없이 출근 안 하는 일까지 있을 정도였다. 


특히 교장 선생님이 휴가를 가신 사이에 요리사인 뺀디가 출근하지 않았던 일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아침 밥을 먹기 위해서 나왔는데, 빈 식탁을 바라봐야했던 그 심정을 어찌나 착찹하던지.... 우리는 교장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고, 그러자 교장 선생님은 수화기 너머에서 허허허하고 웃으시며 이렇게 한 마디 하셨다.


"내가 뭐랬어요? 출근 안 하고 그런다니까요."

평소에는 불같은 성격의 교장 선생님이었지만, 이런 상황에는 익숙한지 화조차 내지 않고 그저 웃으실 뿐이었다.     


이런 인도네시아인들의 성격은 이번 UNDP 사업에도 반영되었다. 다른 나라에서 먼저 개발 지원을 해주겠다고 손을 내밀면, 지역민들이 고맙다고 나서서 동참하는 것이 이성적으로는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곳은 굉장히 독특하게도 내 돈 내고 도와주려고 해도, 인니들을 찾아가서 도와주겠다고 사정을 해야 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에 처음 오는 NGO관련 일을 하시는 분들은 회의감을 많이 느낀다고 한다. 도와주면서 만족감과 뿌듯함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빌어가면서 돈까지 내야하는 판이니 말이다.


이렇게 해맑게 웃고 있지만, 공무원들에게 나도 몇 번 삥(?)을 뜯길 뻔 했다.


인도네시아에도 필요한 김영란법

요즘은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이곳은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있었다. 공무원들과 지역민들이 "어떻게 하면 지역을 성공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보다는 이번 기회에 어떻게 하면 자신의 호주머니를 채울 수 있을까 고민을 했다.


관공서의 업무를 하기 위해서는 뒷돈을 주지 않으면, 공무원들이 일부러 시간을 끌면서 일을 지체시켰다. 반면에 돈을 주면 절대로 불가능할 것 같은 일들도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과연 돈으로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왜 그리도 각 나라에서는 부정부패를 척결하려고 하는지를 말이다. 얼마 전에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김영란 법>으로 인해서 국가 내수 사업이 위축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기사만 봐도 그 동안 공무원들이 접대라는 명목하게 얼마나 많은 소비를 촉진(?) 시켰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김영란 법이 시행된 뒤로 고급 음식점 및 꽃집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매출이 급감했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김영란 법이 부패를 잡으려다가 나라를 망친다고 말했다.' 


과연 그 말이 맞는 것일까? 나는 그 말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의 상황을 보면서 부패란 반드시 척결해야한다는 것임을 깨달았다. 김영란 법의 시행으로 인해서 당장에 내수 시장이 얼어붙을 수는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나라의 부패도가 높을수록 일을 추진하려고 해도, 자꾸만 돈이 새어나가고 일의 진척은 없다는 것. 나는 인도네시아에 와서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분명 50년 전만 해도, 한국이 인도네시아보다 못 살았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이런 공공연한 부패는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의 다른 국가들의 발전에 큰 장애 요소가 되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지금은 인니들 가운데서도 외국에 유학을 다녀오거나, 해외의 문물을 많이 접한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보니 의식의 개선이 많이 행해지고 있었지만, 아직도 그렇지 못한 곳들도 많았다.          

 

특히 알리민 박사님은 미국에서 6~7년 가량 공부를 하고 오셨다고 했다. 젊은 시절에는 인도네시아의 농림청의 국장으로 지내셨다고 하셨는데, 그래서인지 영어를 잘하셨다. 물론 인도네시아 특유의 이상한 발음을 썼지만, 그의 영어 구사력은 사실상 나보다 뛰어났는데, 덕택에 다른 현지 직원들과 다르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우리는 농담을 하면서 친해졌고, 덕분에(?) 알리민 박사님은 나에게 컴퓨터로 해야 하는 업무가 있으면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나 역시 알리민 박사님이 작성하고 있는 문서들이 UNDP 사업에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렇게 우리들의 기묘한 협력 관계는 시작되었다. 


알리민 박사님은 외국에 오래 나갔다 오시고, 한국에 있는 가나안 농군학교에 2번이나 방문해서 교육을 받으셨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다른 인니들과 다르게 부정부패의 척결과 성실과 근면에 대한 인식이 높았다. 알리민 박사님은 자주 말하곤 하셨다.


지금 이 나라에 필요한 것은 바로 Mental 이라고. 아무리 물질적인 지원이 이어진다고 해도, 성실하고 근면한 정신이 없으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밖에 되지 않는 것이라고. 인도네시아 사람의 입에서 듣는 근면과 성실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이지 감회가 새로웠다. 비로소 교장 선생님이 그토록 강조했던 가나안의 정신이 금방이라도 인도네시아에 뿌리를 내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음 날, 나에게 일을 부탁해놓고, 로비에 있는 쇼파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알리민 박사님을 보면서,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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