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고추농사)
누가 그랬던가. 인류는 농사를 시작하면서 요통을 앓았다고(feat. 고추농사)
아침부터 감기 기운이 있었다. 지난번 자카르타에서 수카부미까지 올 때 차에서 밤새 에어컨을 틀어놓고 왔을 때부터 몸이 으슬으슬하던 것이 감기가 된 것 같았다.
몸 상태도 좋지 않은데, 하필이면 간밤에 비가 왔다. 지난번에 비가 온 다음에 토양이 축축해지면 고추 농사를 짓기로 했었다. 우리는 고추 밭으로 향했다. 하지만 가는 동안 또다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주미란 아저씨와 일용직 근무를 하는 아줌마들은 비가 쏟아짐에도 농사를 짓고 있었다. 한국에서라면 분명 처마 밑으로 비를 피했을 상황이었다.
주미란 아저씨는 우리보고 집에 들어가 있다가 비가 그치면 다시 오라고 했다. 비를 맞으면서 일을 하고 있는 아주머니들을 보니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감기 기운까지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비를 맞고 일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시 숙소로 향하는데 왠지 발걸음이 무거웠다. 자꾸만 비를 맞으며 일을 하던 주미란 아저씨와 아줌마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세삼 지금까지 내가 누리는 특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겨우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비가 오는데 농사짓는 일에서 열외 되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나도 주미란 아저씨와 함께 비를 맞으며 일하겠다고 나섰어야했다. 하지만 그런 궂은 일을 하기 싫었다.
한국에서는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지 못했다고 툴툴거리면서 남들과 나 자신을 비교해놓고, 이곳에서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특권을 누렸다. 나는 그런 치졸한 사람이었다. 내 스스로의 가식적임에 치를 떨면서도, 속으로 감기 기운이 있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되뇌었다.
숙소에 도착해서 잠시 쉬자 비가 그쳤다. 우리는 다시 밭으로 향했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모종을 심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모종을 심어야할 위치에 놓기 위해서 이리저리 모종을 옮겼다. 비가 와서 인지 고추밭은 온통 진흙 투성이었다. 걸을 때마다 신발에 진흙이 잔뜩 달라붙었다. 점점 내가 신고 있는 것이 신발인지 진흙 무더기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의외로 가볍게 보았던 진흙의 무게는 무거웠다. 이제는 걷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고추밭 일은 말 그대로 단순노동이었다. 인간이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부터 요통에 시달렸다는 <사피엔스>를 쓴 유발하라리의 말처럼, 농사를 짓는 일은 정말이지 허리가 아팠다. 어떻게 아주머니들은 매일 이런 일을 하는지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밭은 생각보다 크지 않아서 오전 중으로 어느 정도 끝이 났다. 오후에는 쉬기로 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고추밭을 갔다 와서 샤워를 한 뒤 약을 먹었더니, 몸이 으스스하게 춥고, 자꾸만 설사를 반복했다. 나는 이 더운 날씨에 감기에 걸린 것이다. 저녁에는 온몸에 열이 나서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계속해서 침대에 누워서 잠을 잤다.
이전에 교장선생님이 열이 나면 말라리아나 장티푸스, 댕기열 같은 풍토병을 의심해야 된다고 하셨는데, 앓아누우면서도 계속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때마침 교장선생님도 휴가를 가신 터라, 병원을 갈 수도 없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약을 먹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외국 나와서 아프면 굉장히 서럽다는 말을 깨달았다. 말도 잘 안 통하고, 병원도 굉장히 멀리 있어서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저 풍토병이 아니길 바라면서, 몸 상태가 괜찮아지길 바랄 뿐이었다. 처음으로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보고 싶다는 생각과 한국에서 내가 누리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들이었는지 세삼 깨갈았다.
그렇게 2박 3일을 침대에서 누워서 보내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다행히도 풍토병은 아니었나보다. 한국에서 예방접종을 안 맞아도 된다고 해서 맞지 않고 왔는데, 정말이지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