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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심삼일 글쓰기 Nov 17. 2019

#9. 인생이란 새옹지마와 같다

인도네시아 가나안 농군학교 이사장님의 방문


인도네시아 가나안 농군학교의 이사장님 방문 

- 인생이란 새옹지마와 같다


오후에 전인수 이사장님께서 찾아오셨다. 이곳 가나안 농군학교를 설립하는데 재정적으로 지원해주시고, 지금까지도 계속 후원해주시는 분이었다. 이사장님은 젊은 시절 한국을 떠나와서 방콕, 두바이, 인도네시아 등등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사업을 하셨다고 한다. 1960년대에 외국으로 나간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이사장님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다. 그 당시에는 외국에서 한국이라는 나라는 알지도 못했고, 더군다나 외국에 진출한 한국인들도 많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도움을 받을 곳도 마땅치 않았고,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생활하면서 많은 문화적 차이로 인한 고충을 겪었다고 하셨다. 


특히 한 번 아플 때마다 서러움을 느꼈다고 하는데, 나 역시 얼마 전에 감기로 고생을 했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이사장님의 얼굴에 선명하게 새겨진 주름살이 지금까지의 성공을 거두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셨는지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이사장님이 이야기를 듣다보면, <인생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장님은 처음에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해서 무슨 일을 해야 될지 몰라 방황했다고 한다. 그때 마침 검문에 걸려서 군대에 끌려가게 되었는데, 하필 그 군대가 카츄사였다는 것. 


이사장님은 카츄사에서 영어를 배웠다고 한다. 3년간의 군복무를 끝냈을 무렵에 영어로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한국은 6.25 전쟁 이후 폐허가 된 상태였고 기아로 굶어죽는 사람들도 곳곳에 많았다고 한다. 


이사장님은 한국에서 굶어 죽느니 외국으로 나가서 접시닦이라도 하면 굶어죽지는 않지 않겠냐는 생각으로 무작정 홍콩으로 떠났다고 했다. 늦은 밤 도착했던 홍콩의 밤은 휘황찬란했다. 순간 이곳이야 말로 천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 당시 한국은 전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서 밤만 되면 온통 어두컴컴했다고 한다. 그런데 홍콩에 도착해서 화려하게 수놓아진 불빛을 보고, 문득 고국 한국의 불우한 운명에 대한 연민으로 눈물이 나려고 했다고 한다. 그렇게 홍콩에서 5일간 머무른 뒤에 방콕으로 떠났고, 버려진 신문을 주워서 구직란을 통해서 일자리를 구했는데, 그때 마침 연락이 닿은 곳이 바로 ‘무역 회사’였다고 한다. 면접을 보러가자 그곳의 면접관이 한국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영어를 잘하냐면서, 그 자리에서 채용했다고 한다. 

  인생이란 새옹지마라, 갑작스럽게 군대에 끌려간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이사장님은 이렇게 말하셨다. 


“군대에 끌려간 것이 내 인생을 바꿨어. 당시에는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인들만 잔득 있는 군대에 와서,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내 인생을 불평했지. 군대를 전역하고 나왔는데 너무 막막한 거야. 나는 가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돈 한 푼 없었지만, 그래도 영어를 할 줄 알았지. 그때는 몰랐어. 외국에 나가서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나 다른 능력이 아니라, 외국인들과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을. 나는 영어를 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역회사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몇 년 뒤에는 내가 무역회사를 설립해서 지금까지 오게 되었지.”     


인생에 있어서 무의미한 시간은 없다. 나는 그 말을 세삼 깨닫게 되었다. 가끔 무의미 없다고 생각되는 시간들도, 지금 이곳에서 일을 하는 시간들도, 분명 훗날 다 값진 재산이 될 것이다. 막상 생각해보면 나는 27살이라는 나이에 대학을 졸업하지도 못한 채 이곳으로 왔다. 대부분 요즘 대학생들은 휴학을 하고 회사에서 인턴을 한다. 흔히 남들이 말하는 ‘스펙’을 쌓고, 취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반면에 휴학을 하고 내가 했던 것들은 대부분 글을 쓰거나, 여행을 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일들이었고, 그것들은 비록 스펙은 아니었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이었다. 이번에 1학기 졸업을 미루면서까지 NGO에서 인턴쉽을 하는 것 역시 대학 생활 중에 한번쯤은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 거야!”라고 남들 앞에서 자신 있게 말하면서도, 은연 중에 내 이력서에 써내려갈 것들, 단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스펙들이 없다는 사실에 불안해했다. 왜 나는 내 이력서에 쓸 것이 없다는 사실을 두려워해야만 했던 것일까?


어쩌면 내가 해온 일들은 남들에게는 무의미하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일들일지도 모른다. 스펙이 안 되니까,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내가 겪었던 모든 일들이 때로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좋은 화제 거리가 되었다. 인도네시아에 와서도, 교장선생님을 만나고, 이사장님을 만났을 때도 그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딱히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다양한 경험은 상대방의 말을 쉽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때로는 내가 아는 내용이 나오면 맞장구 칠 수도 있었다. 운동을 했던 것 역시 인도네시아의 더운 날씨에도 꿋꿋이 견딜 수 있게 해주었고, 군대에서 배웠던 행정과 잡일들 역시 많은 도움이 되었다.     


비록 지금 나는 불완전한 사람이고, 지금 나의 노력이 당장에 눈에 보이는 성과를 이루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중에 반드시 좋은 결실을 거두리라 믿는다. 그때까지 더 이상 남들과의 스펙경쟁에서 불안해하지 않기. 나만의 길을 꿋꿋하게 가기.     


항상 불안에 떨고 조급했던 나였지만, 인도네시아에서만큼은 이렇게 낮잠을 자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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