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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봉녀 Sep 25. 2021

아빠가 되돌려준, 추석 용돈

사표를 내고 '불효자'가 됐습니다

띠링~ 

은행 앱의 알림이 울렸다. 

돈이 입금됐다는 걸 알리는 알림. 

추석 바로 다음 날이었다.


돈을 입금한 사람의 이름은 다름 아닌, 아빠. 

액수는, 바로 전날 드린 추석 용돈과 일치했다.  


띠링~

조금 뒤, 이번엔 카톡 알림이 울렸다. 

발신인은 역시 아빠.


"요즘 직장도 다니지 않는데, 준비하는 일로도 바쁠 텐데, 굳이 부모 용돈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 만날 때 커피값에 보태거라." 


정말 어지간하다. 


깐깐하고 철두철미하면서도, 심지어 70살이 넘은 지금껏 크리스털보다 더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가 바로 우리 아빠다. 여전히 줄지 않는 에너지로 엄마와 세 명의 딸들은 물론 세 명의 사위들을 넘어 심지어 손주들에게까지 이런저런 주문을 쏟아내는 분. 어지간하게 넘기는 법 없고, 어지간히 눈감는 법도 없는 분. 그런 분께서 추석에 내가 드린 용돈을 은행 계좌로 다시 돌려준 것이다.


어지간하지 않은 반응이 올 걸 알면서도 "아빠, 저 회사 관뒀어요"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이미 잘못된 셈이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아빠는 세 딸 중 나를 유독 믿어줬다. 마른 체구에 밥도 잘 안 먹는 언니와 동생에 비해 어릴 때부터 '듬직한' 체형인 나의 이미지가 누가 봐도 믿음직스러워서 그렇거니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말을 잘 듣거나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다. 아빠 말에 특별한 대꾸 없이 수긍하는 언니, 동생과 달리 나는 예나 지금이나 한 번씩 솟아나는 반골기질을 발휘하곤 했다. 아빠의 말을 조목조목 비판해, 아빠는 물론 주변 가족까지 피로감에 휘말리게 할 때도 잦았다. 혼나는 걸로 치면 셋 중 언제나 1번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아빠는 늘 나에게 "믿는다"라고 했다. 


내가 고등학생 때는 한 밤 중 독서실 앞으로 찾아와 조용히 3만 원을 쥐어주기도 했고, 중학생 땐 그 시절 친구들도 거의 갖고 있지 않았던 삐삐(!)를 제일 먼저 사줬으며, 대학생 땐 밤늦도록 술 마시고 새벽에 귀가해도 단 한 번도 혼을 내지 않았다. 언니의 귀가 시간이 밤 12시만 넘겨도 온 집안에 불호령이 떨어지는데 반해 나는 새벽 2시에 들어가도 집 전체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그럴 때면 나는... 조금만 마셔도 취하는 언니와 달리 웬만해선 취하지 않는 강철 체력의 소유자인 나를 아빠도 굳이 걱정하지 않는다고만 여겼다.  


스무 살을 넘기고부터 아빠는 내게 특별한 주문 없이 묵묵히 지켜봐 줬다. 부모가 자식을 믿고, 자식이 부모를 믿는 일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물을 수 있지만 아빠의 그 "믿는다"라는 말이 주는 에너지는 나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줬다. 누군가 나를 믿어준다는 사실은 그때그때 내 앞에 놓인 과제에 충실해야 한다는 암묵의 책임감을 키워주는 영양제였다. 간혹 사람들에, 일에, 세상에 치여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집에서 나를 지지하는 부모님이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든든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아빠는 말했다. 

"네가 주는 용돈은 부담 없이 받을 수 있다."


그건 믿음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아주 많지 않아도, 오랜 기간 따박따박 월급 받은 딸에게서 받는 용돈이니 부담을 덜고 받겠다는 말이었다. 뭐, 명절이나 생신 때만 드리는 용돈이라고 해봤자 그리 큰돈도 아니었다. 매달 생활비를 보태거나 용돈을 꼬박꼬박 챙겨드리는 여느 자식들과 비교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었다. 


그러던 아빠가 추석 용돈을 은행 계좌로 송금해 되돌려 줬을 땐... 느닷없이 '불효자'가 된 기분이 순식간에 들이닥쳤다. 한 순간이었다.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 못할 바 아니다. 되려 죄송한 마음이 크다. 이 나이게 되어서도, 회사를 관뒀다는 사실은 부모님에게 걱정을 안기는 일이란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내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 뜻밖에도 부모님에게 커다란 걱정의 씨앗을 심어준 꼴이었다. 정말이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 죄송함에서 멈췄으면 좋으련만. 웬만해선 멈춰지지 않는 인간 또한, 나란 사람이다. 

 



아빠가 되돌려준 용돈을 다시 아빠 통장으로 '되되'돌려준 다음 날. 카톡이 또 울렸다. 역시 아빠였다. 이번엔 실업 급여 제도에 대한 설명이었다. 


몇 달 전 회사를 관뒀다고 말했을 때부터 나를 보면 흔들리는 눈빛을 숨기지 못하고, 때때로 "잘하고 있냐?"라고 묻는 아빠를 볼 때마다 속으론 부모가 자식 걱정하는 건 당연하다고 여기면서도 불쑥불쑥 명치 언저리에서 무언가 스윽 올라오는 걸 느꼈다. 급기야 추석 용돈도 모자라 실업급여 걱정까지 하는 아빠의 문자를 받고 나니, 드디어 임계치를 넘어섰다는 사이렌이 울렸다.  

 

20년 가까이 일하다 잠시 쉬어가는 것일 뿐이라고, 가정을 꾸리고 남편과 우리 나름의 삶을 설계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니 더는 자식 걱정을 하지 말아 달라는... 문자메시지를 '폭탄'처럼 던지고야 말았다.  


오래전부터 아빠가 "너를 믿는다"는 말을 주문처럼 할 때마다 나는 그 말에 책임을 지려 했다. 물론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순 없다. 늘 기대에 부응했다고도 결코 말할 수 없다. 다만 부족하지만 실망은 시켜드리지 말자는 다짐만큼은 잊지 않고 지냈다.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닌 '지금'인가 보다. 이제 아빠는 '믿었던' 나를 '걱정하고' 있다. 그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보다 자존감이 흔들렸다. 


일흔을 넘긴 아빠는 꼭 내가 아니더라도 걱정할 게 많은 나이이다.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 본인의 몸 곳곳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노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 요즘 부쩍 먼저 떠나시는 친구분들로 인한 상심에, 걱정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거기에 내가 '자식 걱정'까지 보태다니. 부지불식간에 불효자가 된 기분에 며칠 동안 머리가 지끈댔다. 나의 사표가 아빠에게 불효가 될지는 꿈에도 몰랐으니까. 잦아들지 않는 아빠의 '걱정 폭탄'에 나는 '반박 폭탄'으로 맞섰지만, 폭탄이 오고 간 자리에 남는 건 여지없이 상처뿐이다.


사표의 후유증, 생각보다 오래간다.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아빠가 되돌려준 추석 용돈에 대한 이야기를 쉼 없이 쏟아냈다. 그녀 역시 초등학생 아들을 키우는 엄마여서인지, 특별하지 않다는 투로 무덤덤하게 답이 돌아왔다. 


"원래 부모는 눈 감는 순간까지 자식 걱정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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