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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봉녀 Aug 24. 2021

의사가 말했다 "적당히 걸으세요"

#3. 내가 걷는 이유

왜 마음과 몸은 늘 따로 움직이는 걸까. 머리와 가슴은 제각각의 방향으로 흐르고, 말과 행동의 어긋남은 자꾸만 반복될까.  


얼마 전, 족저근막염 직전의 걷기 중독이라고 말해놓고 보니 덜컥 겁이 나서 병원으로 달려갔다. 양쪽 발목을 엑스레이 위에 올려두고 요리조리 사진을 찍고는 양손 가지런히 모으고 의사 앞에 앉았다.


두근두근.

정말 족저근막염이면 어쩌지.

고생을 많이 한다는데.

이제 '걷기 중독'과는 이별인가.


속으로 불안과 걱정, 괜찮을 거라는 기대가 숨가뿌게 교차하는 내게 의사는 말했다.


"적당히 걸으세요."


그러더니 내 양쪽 발목 엑스레이 사진을 화면에 띄우고 뒤꿈치 아킬레스건 안쪽 부근 뼈를 가리켰다.


"보이시죠? 양쪽 다 뼈가 조금 튀어나왔어요. 그 영향인지 아킬레스건 옆 혈관이 조금 부었고요. 심한 건 아니고요. 지금은 증상 없어도 나중에 많이 아플 수도 있습니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양쪽 발목 뒤꿈치에 손톱만큼 아주 작게 뼈가 도드라져 보였다. 많이 걸어서 변형된 게 아니라 원래 그렇게 태어난 걸 수도 있다... 고, 믿어보려는 내 심리를 간파했는지 의사는 다시 강조했다.


"많이 걷는 게 꼭 좋은 건 아니에요. 적당히 걸으세요."


족저근막염은 아닌가요?

"네 부위가 달라요. 그건 발목이 아니고 발바닥에 통증이 나타납니다."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아직 못 가본 길도 많았다. 로망의 성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얼마 전 발견한 신안 섬티아고길은 가을 즘 걸어보려 했는데. 남해 바래길도 가봐야 하거늘. 혈관이 붓고 뼈도 튀어나왔다니.


게다가 걷지 말라는 진단도 아니고 '적당히 걸으라'는 건 또 무슨 의미인지. 1km를 걸으라는 거야, 5km까진 괜찮다는 거야, 그랗다면 10km는 이제 무리라는 거야. 혈관이 부었다는 말보다 그 '적당히'가 문제였다. 걷지 말라는 선언보다 알아서 요령껏 하라는 그 '적당히'가 문제였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적당히라는 말은 늘 경계해야 하는 단어였다. 적당히 해서는 끝장을 볼 수 없었다. 몸담았던 업계는 치열한 경쟁 체제로 움직였고, 상대보다 먼저 그들이 모르는 이야기를 세상에 전해야 했다. 때때로 남들은 생각지 못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했고 문제를 파고들거나 문제를 발견해야할 때도 많았다. 적당히 해서는 결코 버틸 수 없는 세상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매번 적당히 하고 싶었다. 속도전에서 이길 자신이 없었고, 매일 참신한 이야기를 발굴할 감각도 부족했으며 무엇보다 그걸 해낼 탁월한 능력이 없었다. 그럴 때면 늘 '적당히'의 유혹이 솟아난다. 적당히 하자. 이 정도면 되잖아. 유혹의 속삭임이 일었다.  


'적당히'는 '열심히'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매일 노트북을 끼고 살아야 하는 직업이었고, 시도 때도 없이 자판을 두드리면서 수년을 살아야 했다. 열심히는 알았지만 적당히의 방법을 몰랐다. 그걸 알았다면 손목 건초염 따위는 발병하지도 않았겠지. 적당히를 모르던 시절의 나는, 적당히 노트북을 두드리는 데 실패해 오른쪽 손목에 적당하지 않은 건초염이 생겼다. 웬만해선 낫지 않는 그 병을 친구로 만나 벌써 5년째 동반자로 지내고 있다. 


어떤 때에는 같이 일하는 동료들까지 내게 '적당히 하라'고 말할 때가 있었다. 적당히, 혼자 그렇게 열 낼 필요 없다고도 했다. 그 말은 내게 위로는 커녕 당부로도 다가오지 않았다. 각자 맡은 바 혹은 부서에서 처리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고, 누군가 적당히 하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주어진 일의 무게는 그만큼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적당히 하라고 '조언'(!)하는 사람들은 신기할 정도로 적당히를 몸소 실천하는 이들이었다. 맡은 일만 책임질 수 없는 곳이... 우리네 직장 아니던가. 누군가의 적당히는 누군가의 열심히를 의미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 치솟는 감정은 억울함이었다. 일하는 총량을 저울에 달아 재볼 수 있다면, 그렇게 해보고도 싶었다.


적당히가 어렵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의사로부터 적당히 걸어야 한다는 진단을 받은 그날에도 나는 의식하지 못한 채 5.7km를 걸어... 버렸다. 병원을 오가면서 걸었고, 식사를 약속한 장소까지 걸어서 오갔다. 10km를 넘지 않았으니 다행인가, 아니면 물리치료를 받으면 괜찮아 질테니 다행인 건가. 


나에게 적당히 걷기란 과연 가능이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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