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봉녀 Aug 25. 2021

'입사동기'보다 각별한 '퇴사동기'

'멈춤' 버튼 누른 사람들의 암묵적 연대

얼굴을 보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눈빛이 마주쳤을 뿐인데도 서로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


꽤 오랫동안 같이 일한 후배를 오랜만에 만났다. 함께 근무한 시간이 9년, 같이 일하지 않게 된 지 2년이 조금 안 된 사이. 사표를 내고 싶지만 용기가 없고 계기도 없어 차일피일 속으로만 되뇌던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 날 후배가 말했다. 


"한 달 뒤 퇴사하겠습니다."


그때 내 머리를 스친 건 '선수를 빼앗겼네'라는 얼토당토않은 당혹감이었다. 좋게 말하면 '좌고우면', 솔직히 털어놓으면 '갈팡질팡'하던 나를 앞질러 후배는 훨씬 용기 있게 선언했다. 그리고 정확히 한 달 뒤 회사를 떠났다.


당시 부서의 중간 직급을 맡고 있던 나는 현실적인 문제부터 덜컥 걱정되기 시작했다. 부서의 인원이 뻔했기에 결원이 생기면 나머지 부서원들의 일 부담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우려됐다. 나도 사표 낼 생각으로 꽉 차 있는 처지에 부서 걱정 그리고 회사 걱정할 때인가 싶다가도, 눈앞에 놓인 현실 난제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 고민이 깊어진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런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런저런 상황이 겹치면서 얼마 뒤 나 역시 갈팡질팡하던 마음에 마침표를 찍고 사표를 냈다. 후배와 내가 회사를 관두는 이유가 각자 달랐지만 '변화가 필요하다'는 절박함만큼은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퇴사동기'가 됐다.



'동기'라는 말에서는 안온한 기운이 풍긴다.  특히 같은 시기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만난 '입사동기' 사이라면 더 각별하다. 낯선 환경, 낯선 일, 낯선 사람들 틈에서 그나마 정신을 온전히 붙잡도록 돕는 존재는... 두말할 것도 없이 입사동기였다.


입사동기의 끈끈한 연대는 예상보다 오래갔다. 이제는 같은 회사에 다니는 사람보다 다른 곳으로 흩어진 이들이 더 많지만, 자주 보지 못해도 아주 가끔 안부를 물어도 곧장 그 시절 그 마음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신묘한 힘을 주는 존재가 바로 그들이다.


입사동기만 그럴 줄 알았다. 웬걸.
 퇴사동기가 생기고 보니,
이들은... 신묘함을 넘어 기묘한 공감까지 주는 존재 아닌가.


같은 회사에 다닐 땐 상, 하 관계로 나뉜 위치 탓에 아무리 편히 지내려 해도 엄격히 구분된 선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울타리에서 벗어나 비슷한 시기에 같은 상황에 놓으니, 어느새 관계는 수직에서 수평으로 이동해 있었다. 그땐 차마 못 다 꺼낸 속내가 이제는 누가 떠민 것도 아닌데 스스럼없이 술술 풀렸다.


사표를 내고 보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건 후배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갖고 있던 직업이 각자에게 얼만큼 각별했는지, 그 직업을 통해 이룰 수 있는 일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를 멈추고 보니 알았다. 그렇다고 둘 다 후회가 남는 건 아니었다. 우물 안에 갇혀 보이는 세상만 바라보고 달려온 지난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사표... 그 하나로 깨달았다.


비슷한 상황에 놓여 비슷한 고민을 하는 동료가 있다는 행운이다. 입사동기가 '출발' 버튼을 함께 누른 사람끼리 공유하는 설렘을 상징한다면, 퇴사동기는 '멈춤' 버튼을 누른 사람끼리 공감하는 암묵적 연대를 상징하는 것만 같다.


후배는 지금 새로운 직장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익숙한 문을 닫고 났더니, 빛나는 새 문이 열린 셈이다.



이전 04화 의사가 말했다 "적당히 걸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