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맞을 준비

2024년 9월 19일

by 들무새

일상같은 추석 연휴 다섯 날을 보내고

연휴같은 일상이 다시 시작되는 첫 날.

퇴직 열흘 차. 이제 고작

빨간 날 닷새, 검정 날 닷새가 지나갔을 뿐이다.


막내 딸을 학교에 내려주고 도서관에 왔다.

2권의 산문집 ‘나무 탐독’(박상진, 샘터)과

‘쓰기 일기’(서윤후, 샘터)를 읽었다.


‘나무 탐독’은 50년 동안 나무를 연구해 온 임학자의 산문집이다.

모과나무, 탱자나무 등 나무별로 한 편씩

나무에 대한 이야기나 추억, 답사경험 등을 담담히 정리했다.


나는 요즘 도서관에서 책을 꼼꼼이 읽기 보다는

어떤 주제로 공부를 하고, 어떤 글을 쓰면 좋을지

이런저런 책을 구경하는 중이다.


마치 낯선 여행지에서 이 골목 저 골목

흥얼거리며 구경하듯 책 사이를 누빈다.

그런데 그렇게 걷다보면 나도 모르게

자꾸 발걸음이 빨라지는 걸 느낀다.


자꾸 더 읽어야 할 것 같고,

읽었으면 뭔가를 써야 할 것 같다.


점심 먹으면서 아내에게 이런 증상을 얘기했더니

아주 간단 명료한 처방을 줬다.

“그냥, 천천히 읽어.”


늘 마감시한에 쫓겨 있던 직장생활 습성이

나도 모르게 마음에 배인 건 아닐까

점심을 먹고 도서관으로 되돌아오는 길에

다시 생각해보았다.


‘쓰기 일기’는 말 그대로 일기를 모아놓은 산문집이다.

블로그 글들을 모아놓은 듯한 책이어서 손이 갔다.

시인인 저자는 이 책을 묶은 이유에 대해

“내가 쓴 시에 대해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무척 멋쩍은 일”이라며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들키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도 희한한 일”이라고 적었다.


자신의 일기를 누군가 읽어줄 수도 있을 거라는

독백의 반칙같은 마음으로 일기를 쓰고 모았다고 한다.

그 중 어느 날의 일기 한 대목이

요즘 내 조급한 마음과 닮아있어 옮겨본다.


“읽지 못한 책들을 보며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고,

무언가를 쓰지 않는다고 하는 불안감에 쫓기지 않으며,

자꾸 생산하려 드는 나의 욕망을 잠재우고

가장 기본적인 욕망에만 충실히 하는 것”


한동안은 내적 흥분을 경험하지 않고 싶어

시도 쓰지 않고 책도 읽지 않았다는 시인의 변이다.

나는 좀 고여있어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많이 읽고, 천천히 지켜보고, 가까이 느끼면서

그러다 생각이 고여 넘칠 때까지 좀 기다려보기로 한다.

직장에 다니면서 나는 아내에게 곧잘 이렇게 투덜댔다.

“계절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겠어. 그게 제일 서글퍼.”


이제 시간은 나의 편이다.


천천히 떠나보내고 찬찬히 맞이하면서

내 인생의 가을 속으로

느린 걸음으로 들어서고 싶다.

역대급으로 무더웠던 올해 여름이 어떻게 천천히 퇴각하는지

느릿느릿 흘러가는 동네도서관 뒷마당의 풍경 속에

허수아비처럼 슬쩍 끼어앉아 지켜보면서

서늘한 가을 바람에 엄살 섞은 몸서리도 좀 쳐볼까 싶다.

가을 맞을 준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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