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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Jan 28. 2021

박물관 도슨트가 되기까지

나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남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넌 꼭 말빨로 돈 벌 거야. 간혹 친구들이 말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누구 앞에서든 꽤나 번지르르하게 말을 잘하곤 했던 나 역시도 '말빨'로 어떻게 벌어먹고 살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해 온 것 같다. 녹록지 못한 세상과 환경에서 그나마 이런 능력이라도 타고나서 다행이다 싶었다. 박물관 도스트는 이런 나에게 천직인 듯싶었다. 


나는 우주의 먼지로소이다 - 대학원 시절


  내가 말을 잘한다는 믿음은 대학원 진학 이후 산산조각이 났다. 역사라는 광범위한 학문은 내가 그저 우주의 작은 '먼지'에 불과하다는 걸 뼈저리게 알게 해 주었다. 나는 그저 잘 알지도 못하는 사실들에 그럴싸한 수식어를 붙여 으스대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모른다고 시인하는 솔직함이 삶의 담백한 진리임을 알았다. 기고만장한 달변가에서 겸손한 벙어리로 둔갑하기까지, 수도 없이 스스로를 깎아내릴 수 있었던 내 인생에 둘도 없는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3년간 진행해 온 역사토론교실

  우주의 작은 먼지라는 정체성을 깨달았다고 해서, 역사 교수 혹은 강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접은 건 아니었다. 책상머리에서 혼자 무릎을 치며 알게 된 새롭고 흥미진진한 사실들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 단순한 문장으로 정리될 수 없는 우리네 인생처럼, 역사라는 학문 또한 얼마나 모순투성이인지를 알려주고 싶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사람들은 정말 자신들을 '한 민족'이라 생각했을까? 왜 백제는 일본과 친하게 지냈을까? 세종대왕이 한글을 발명한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순신은 정말 나라를 지키고 싶었던 걸까? 내가 만약 일제강점기 때 태어났더라면 친일파가 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등. 팩트를 암기하는 교육과정에 익숙한 기존 역사에 대한 고정관념의 판을 뒤집는 질문으로 채운 수업에 꽤나 많은 수강생이 모였다. 

  역사는 결코 특정한 답을 내릴 수 없는 학문이라는 사실을 전달하면서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 쾌감은 또 다른 자만이었음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알게 되었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 심지어 아직 한국사를 배우지 않은 초등학생들까지도 마음으로는 이미 역사의 모순을 이해하고 느끼고 있었다. '답정너' 사회의 룰 속에서 모두가 피어오르는 의문들을 꾹꾹 눌러 담고 있었을 뿐. 

  많은 시간들 속에서, 나름 배운 사람이라는 우쭐함이 내 자만의 심연 속에서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있었던 것이다. 부끄러웠다. 내가 역사를 배우고 또 나누는 이유는, 단지 답이 없는 것들을 함께 고민하여 답이 없는 세상에서 나름의 답안지를 작성하기 위하기 때문이란 걸 지난한 시간을 통해서 다시 깨달았다. 

  정말이지, 나는 우주의 먼지로소이다. 



심장마비 올 뻔했던 해설시연 면접


  3년 간의 강사생활. 논리와 무논리가 난무했던 대학원 토론 수업. 발제를 준비하며 하얗게 불태운 무수한 밤들. 이 모두가 나를 어떠한 말하기 앞에서라도 단단하게 했으리라 믿었다. 박물관 도슨트라고 흔히 알려져 있는 '전문해설사'가 된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부푼 마음으로 이력서를 제출했다. 1차 서류, 2차 면접, 3차 해설 시연. 무려 3차례의 검증을 거쳐야 하는 승부였다. 

업무계획서를 포함한 길고 긴 자소서를 이때 처음 써봤다

  1차 서류가 합격하고는 떨떠름했다. 회사 면접을 정식으로 보게 될 줄이야, 오히려 지나치게 들뜬 마음 때문에 긴장감도 덜했던 것 같다. 검은 정장 차림의 대기자들이 가득 메우고 있던 강당에서도 생각 외로 떨리지 않았다. 거울 앞에서 수도 없이 연습한 1분 자기소개도 척척, 순조로운 2차 면접이었다. 면접관들의 눈빛을 보며 나름 합격을 확신했다. 채용공고를 보고 너무도 설렜다는 오글 멘트도 표정 하나 안 바뀌고 하는 스스로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하기도. 

  문제는 3차 면접이었다. 전문해설사로서의 역량이 결정적으로 판가름 나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해설 시나리오를 제출한 뒤, 밤낮없이 연습했다.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에 대해 3분씩 준비한 주제대로 이야기해야만 했다. 임진왜란은 지도교수님 덕에 이것저것 '썰'을 풀 수 있었지만, 한국전쟁은 수능 한국사 팩트 외에는 '잘알못'이었다. 그래도 수강생들 앞에서 수업한 게 몇 년인데, 잘할 수 있을 거라며 불길한 예감을 떨쳐냈다. 


  거울 앞에서 닳도록 연습했건만, 대기실에서 떨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난생처음 청심환을 먹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더군다나 첫 순서는 자신 없는 한국전쟁이었다. 전시실에 들어선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혔다. 구면인 면접관은 2명, 2명은 초면이었다. 날 미치게 만든 것은 주변을 서성이는 관람객들과 면접관들의 차가운 눈빛이었다. 

  차라리 자연스럽게 말하듯이 하면 되었을 것을, 대본의 전체 내용을 달달 외워버려서 오히려 한 부분이 막히면 다음 대사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약 1분간 정말이지 앞이 컴컴해져 말을 아예 멈춘 적도 있었다. 면접관 한 분이 너그럽게 긴장하지 말라며 다독였기에 무사히 끝은 맺었지만 이미 마음 한 켠에서는 '폭망'이라는 두 글자를 되뇌고 있었다. 

  망했다는 자포자기 때문이었을까, 임진왜란을 해설할 때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던 것 같다. 한창 이야기하고 있는데 면접관 한 분이 그만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정말 끝이구나 싶었다. 왠지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던 그 면접관은 갑자기 진열장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교지를 읽어보라 했다. 다행히도 기초 한자만 적혀 있던 터라, 무사히 읽을 수 있었다.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이제 되었다며 가보란다. 아, 집에 가는 길에 눈물을 찔끔 흘렸던 것도 같다. 

교지는 임금의 명령서를 말한다. 내가 읽었던 건 이순신 장군 과거 합격 교지였다. 출처는 문화재청.


  2차 면접 때와는 달리, 합격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반신반의하고 있는 나에게 합격 발표 전 날 박물관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글자 2개가 이렇게 사람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다니, 세상은 살고 봐야 하는가 보다. 


'전문' 해설사의 모순 - 아는 게 없어서 죄송합니다. 


  박물관은 크게 전시, 유물, 학예, 교육 4개의 분야로 나뉜다. 본래 박물관 도슨트는 이 중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고 고객지원 부서 산하에서 일하게 되는 경우가 흔한데, 내가 일하게 된 박물관에는 특이하게도 '전시해설부'라는 부서가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 

  입사 후 나는 3개월 간 별도의 교육, 시험 과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관람객 앞에 설 수 있었다. 내가 준비한 내용을 토대로 진행하는 강의와 달리, 전시관을 훑어가며 유물을 엮어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해설사는 또 달랐다. 유물에 대한 기반 지식 없이는 해설을 진행하기가 어려웠다. 한편 간혹 관람객들이 뜬금없는 질문을 받게 되는 경우도 더러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전문'해설사라 할 수 있을까라는 깊은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게다가 해설을 들으러 오는 관람객들은 천차만별이었다. 학교에서 오는 학생들, 주말에 놀러 오는 가족들, 역사에 흥미가 있는 사람들 등. 관람객의 연령과 상황에 맞춰 똑같은 설명도 다르게 해낼 수 있는 기민함을 갖춰야 했다. 

  제일 힘이 빠질 때는 관람객이 내 해설을 들을 의지가 전혀 없는 경우였다. 학교에서 억지로 오는 중, 고등학생의 경우가 가장 힘들었는데, 심지어 어떤 학생들은 내 바로 앞에서 딴청을 피우며 콩나물(에어팟)을 끼고 있더랬다. 

  난감한 상황도 종종 벌어졌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의 경우, 간혹 팔장을 끼시고 '어디 한 번 들어보자'는 훈장님의 포스를 풍기시는 분들이 더러 있었다. 조금만 본인들의 생각과 다르게 해설하노라면 필시 호통을 칠 기세였다. 

  예상치 못한 갖은 환경이 닥치더라도, 숱한 시간 속에서 나는 사람들에게 최대한 정확하고 많은 사실들을 전달하고자 했다. 내가 준비한 모든 것을 주어진 시간 내에 말하지 못할까 전전긍긍했다. 그러다가 내가 모르는 걸 지적이라도 받으면, '전문'이라는 이름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해설을 하면 할수록 나는 이 모든 것을 내가 모를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하다고 차츰 깨달았다. 역사에 답이 없듯이, 수학의 공식처럼 명쾌한 해설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저 전시관에 진열되어 있는 유물들과 나열된 역사적 사실들이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어떠한 생각과 마음을 주는가를 서로 나눌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때부터 나는 팩트 전달의 일방적인 해설이 아닌, 관람객과 소통하는 해설을 하고자 했다. 나도 모른다는 걸, 모르겠다는 걸 여과 없이 드러냈다. 답이 없는 무수한 사실과 사건들에 대해 다양한 관람객의 의견을 물었다. 그럴수록 해설은 풍요로워졌다. 해설 말미에 진심 어린 박수를 받게 되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 

  다사다난하면서도 마음만은 풍요롭고 행복했던 박물관 도슨트로서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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