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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Mar 05. 2022

도심 한복판에서 산다는 것

청년주택에 살고 있는 비정규직 큐레이터의 작은 감사장

나에게 서울의 첫 인상이란, 퍽 찌푸림이었다. 인천에서 서울, 서울에서 인천, 근 3시간을 출퇴근 길에 쏟아부어야 했던 나는 한강을 넘나들며 도심과 나 사이의 아득한 거리를 되뇌어보곤 했다. 

기차가 멈추고, 흩어지는 군중들 사이에서 상념들을 그러 모으며 터덜터덜, 언젠가 도심 속에서 살 날을 조용히 혼자 고대하곤 했다. 



이 많은 집들 중에

누구나에게 익숙한 푸념일 듯 싶다. '이렇게나 많은 집들 중에 왜 내 집은 없을까?', 그렇다. 이렇게 닭장처럼 빼곡이 많은 공간 중에 내 한 몸 뉘일 공간이 없다는게 참 씁쓸하게 다가올 때가 많다. 인구는 날이 갈수록 줄어든다는데, 왜 수요와 공급의 법칙은 집에는 통하지 않는지. 모두가 그 이유를 알면서도 숙연하게 고개를 숙인 채, 부동산의 꿈을 그러쥐지 못한 애먼 자신에게 속썩이를 할 뿐이다.


공간에 저당잡힌 수많은 생들 

어느 사회학자는 말한다. 한국 사회는 '3불' 사회라고. '불' 자가 들어가서 불교와 관련있는 말인가 싶었는데 그 의미는 열반의 경지를 일러주기는 커녕, 숨이 턱 막히는 우리네 현실을 공공연하게 꼬집고 있었다. 3不은 '불신, 불만, 불안'을 뜻한다. 세 개의 말이 차례로 와 가슴에 못 박히는 듯 하다. 대부분의 이들에게 생이 참 야속하기만 한 작금의 세태를 폭로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모두를 힘들게 짓누르는 건 의식주에서 단연 주일 수밖에 없다. 나만의 공간을 갖는 일이 이리도 힘들 줄이야, 국가와 사회가 지정한 커리큘럼을 고스란히, 또 착실히 밟고 올라왔건만 내 통장에 찍히는 숫자로는 아무리 셈을 다시 해봐도 허탕일 듯 싶다. 결국 내 생을 담보로 공간에 저당을 잡힌 시간들을 고스란히 살아가야 할 터였다. 


청년에게 청년주택이란

나 역시도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나만의 공간을 열망하는 마음이 날로 커져갔다. 나이에 숫자들이 더해질 때마다 다 큰 성인의 공간은 반드시 부모와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치기어린 의지도 샘 솟았다. 결혼과는 요원한 내 삶의 계획 안에서 나만의 공간을 꾸리는 방법은 오로지 독립밖에 없었다. 그 때부터 '나만의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누추했고 또 버거웠다. 숱하게 인천과 서울을 오가며 대학 4년과 대학원 3년을 다니고, 학비는 물론 생활비를 벌어야했던 빠듯한 일상 속에서 나만의 공간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란, 가능한 현실이 아니었다. 기회는 취직과 함께 찾아왔다. 그래도 부모님의 그늘 아래에서 나를 먹이고 재우는 재화는 통째로 아껴둘 수 있었으니 가까스로 독립자금이 모였던 것이다. 

나만의 공간을 찾아서, 처음으로 서울 거리에 나섰을 때 내 수중에 들린 돈은 단 400, 어떻게든 승부를 보아야만 했다.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처음으로 월세와 전세, 대출의 개념들을 찾아보며 '정작 필요한 삶의 기술들은 왜 학교에서 알려주지 않는 걸까' 작은 분을 토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보러 다닌 방들은 참 하나같이 비좁고 어두웠다. 음습한 기운이 서려있는 방을 앞에 두고 새삼 없는 줄로만 알았던 부모의 그늘을 발견하기도 했다. 옹기종기 좁디 좁은 스스로들의 서울 속에서 수많은 사연들을 갖고 살아내고 있을 모두의 존재들이 너무도 슬프게 다가왔다. 

그렇게 수십의 방을 둘러보았지만 결국 나만의 공간은 찾지 못한 채 애꿎은 시간만을 흘려보낸 것만 같았다. 20대 후반의 독립 운동은 이처럼 한바탕의 소란으로만 끝을 맺는가, 체념하고 있을 때였다. 솔깃한 소식이 들려왔다. '청년주택'이라는 것, 난생 처음 들었지만 청년이라는 두 단어가 떡 하니 붙어 있는게 그리 힘이 날줄은 미처 몰랐다. 무주택자라는 나의 신분과 내 초라한 소득분위가 이렇게나 특별한 기회로 찾아올 줄이야. 

신청 서류를 제출하는 날, 너무 기대하지 말자 스스로를 다독였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 


내 생의, 처음이자 또 어쩌면 마지막일 나만의 공간

내 조건에 맞춰 깨끗하고 볕이 잘 드는 서울 속 나의 공간을 찾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숱하게 경험한 터였다. 게다가 청년주택 공공임대의 임대료는 그야말로 내 생에 다시 없을 복권인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저 넘어 어디 존재할 것만 같았던 이상향의 실체였달까. 내 앞에 선 이 물성의 공간이 참으로 생시인건지, 한동안 방 안에서 방방 뛰었던 기억이 선하다. 

청년주택은 이렇게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못 이루어볼 꿈에 가닿게 한 고마운 징검다리일 것이다. 내 삶 속에서 역세권, 도심 한 가운데, 고층에 살 날이 또 올 수 있을까. 임대기간은 6년, 그래도 허투루 살아오진 않았다는 보상심리로 충만하게 다가왔던 청년주택의 기회 덕에 나는 앞으로의 내 꿈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갈 수 있을 터였다. 


사회가 건네는 따뜻한 위로 속에서

한 다큐에서 복지국가 스웨덴의 실업자를 다룬 바 있다. 영상에 비친 그는 해고된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였는데, 얼굴에는 불안해 하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한 달에 180만 원을 실업수당으로 받으면서 다음 일자리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국가와 사회의 사례를 일대일로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저만한 복지를 가능하게 한 스웨덴 국민들의 서로에 대한 신뢰는 얼마나 깊은 것인 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받은 청년주택이라는 큰 위로는 그 사회적 선의를 이해할 여지를 제공했다. 내가 처해 있는 현실 속에서 사회가 복지라는 이름으로 건네는 따스한 위로, 그 위로는 단 한 번의 선의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선 출발선은 다를 수밖에 없다. 또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건, 누구든 삶 속에서 위기와 시련을 마주할 수 있다. 그럴 때 사회가 이렇게나마 내 든든한 뒷 배가 되어줄 수 있다는 확신과 믿음이 있다면,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할 것만 같은 냉랭한 현실 속에서 간신히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희망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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