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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Apr 10. 2022

시급은 3800원

인성은 알바에서 배웠습니다만?

벚꽃이 절정이다. 피어있는 꽃을 보고 있으니 문득 스무살, 갓 대학에 들어갔을 때가 떠오른다. 교실에서 늦은 밤을 지새우던 고등학교 시절이 끝나고 낮 시간, 파란 하늘 아래 야외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벅차던 그 때 그 시절. 20대의 어린 나는 무엇을 고민하며 살았나. 추억의 타래를 따라 기억을 쭉 돌이켜 본다. 얄궂게도 눈 부시고 행복한 순간들 보다도 가슴 시리도록 서럽고 슬펐던 기억이 더 생생하게 떠오르는 듯 했다. 해묵은 감정은 이제 툭툭 털어지고 없지만, 지금의 나를 만들어냈을 것이 분명한 그 고난의 시간들.


"내가 이상한걸까, 아니면 저 사람이 이상한걸까"


입사 3년차, 회사 안에서 동료들과 주고받는 대화의 8-90%는 태반이 욕이다.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말도 있지 않더냐. 어떻게 어딜가든 이렇게 이상한 사람이 천지인 것일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등등. 푸념을 늘어놓다 보면 체증은 조금 가시는듯 하다. 어떤 날 누군가는 분을 이기지 못한 채 소리를 지르거나 누군가는 눈물을 툭툭 떨어트리기도 한다. 일이 뭐길래.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지 않나. 그저 상황이 나쁜 것이지. 혹은 자리가 그 사람을 저리 만들었거나. 이처럼 일을 중심으로 모인 조직에는 바람 잘 날이 없다. 

나이 앞이 3으로 바뀌고나니,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회사나 일에 대한 이야기가 토픽에서 빠진 적이 없는듯 하다. 누가 누가 더 이상한 사람과 일을 하고 있는 지 경쟁이라도 하듯이 갖은 에피소드를 늘어 놓으며 서로는 그동안의 일을 숨 가쁘게 업데이트한다. 

여느날과 다름 없이 친구와 만나 원없이 회사 욕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대뜸 친구는 "그래도 너는 좀 사람에게 무딘 편 아닌가? 강철 멘탈 같아"라며 나를 치켜 세우는 것이 아닌가. 갑작스레 경종이 울린 것처럼, 내가 정말 그런가 눈을 굴렸다. 그러고 보니 나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에게 화가 치솟을 때는 많아도 그걸 감정의 영역까지 끌고와서 힘들어 했던 적은 손에 꼽는 듯 했다. 불현듯 갑자기 궁금해졌다. 나의 아이언맨과도 같은 강철 멘탈의 연원에 대해.


왜 이력서에 알바 경력은 못 적게 하나요?

스무 살, 하고 싶은게 너무도 많았다. 하지만 내 주머니 사정은 녹록치 못했다. 주 4~5일 캠퍼스를 활보하며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은 고등학생 때와는 다르게 지출의 연속이었다. 더군다나 교복이 없어진 터라 나의 개성을 드러낼 만한 각종 꾸밈 비용을 충당해야 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내 눈길은 자연스레 알바 공고에 가 있었다. 자취는 안해서 다행이었지만 일절 용돈을 받지 않고 있었기에 내 갖은 욕망을 충족시킬 한 달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는 꽤나 오랜 시간을 들여 알바를 해야 했다. 

덕분에 내 알바 경력은 화려해지기 시작했다. '편순이'는 학부시절 나의 닉네임과도 같았다. 편의점을 디폴트로 참으로 다양한 알바들을 해 왔다. 과외 선생, 페밀리 레스토랑 홀 서빙, 웨딩홀 안내원, 시험감독, 학원 보조 교사, 강사 등등. 취업을 위해 열심히 이력서를 작성하면서 작은 분을 토한 적도 있었다. 경력 증명서가 없다는 이유로 피 땀 눈물이 서려있는 내 알바 이력들이 그저 나의 뇌리 속에만 고스란히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


담배는 안 피우지만 종류는 다 알아요

처음 알바를 시작한 건 편의점에서였다. 시간은 저녁 6시부터 12시까지, 시급은 3800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계산대 앞에 섰을 때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손님이 들어오기만 해도 전전긍긍하며 애를 태웠다. 낯선 사람과는 대화 자체를 잘 해보지 않았을 적이라서 바코드를 찍을 때에도 식은땀을 줄줄 흘렸던 것 같다. 결국 첫 날 큰 실수를 해버리고 말았다. 쓰레기 봉투를 손님에게 터무니 없이 저렴한 가격에 계산해 줘버린 것이다. 그 손해는 고스란히 월급에서 깎였다. 큰 실수였던 터라 3-4일치 알바비가 순삭되고 말았다. 

그 뒤로 이 정도의 큰 실수를 한 적은 없었지만 늘상 곤혹이었던 건 바로 차고 넘치는 담배 종류였다. 담배를 사러 들어온 손님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매대에 서 있는 내가 담배를 잘 알 것이라 단정 지었다. 예상 외로 헤매이는 모습을 보이면 대체로 짜증 섞인 투로 본인이 피는 담배를 짚어주곤 했다. 모르는 게 잘못은 아니지만 그런 상황이 될 때마다 어디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의 냉소와 핀잔 섞인 말투들이 어린 마음에 비수를 꼿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손님이 없는 시간이면 늘 뒤돌아 담배의 종류와 위치를 달달 외우곤 했다. 손님이 원하는 담배를 냉큼 뽑아오는 게 익숙해지는 데에는 두어 달 정도는 걸렸던 것 같다. 

그렇다. 매대에 서 있다는 이유로 조금이라도 실수할 기색을 보이면 쉽게 짜증을 내던 그들, 나는 그런 손님들의 태도에 늘 마음에 생채기를 입었다. 반말을 툭툭 뱉으며 물건을 대령하라는 식의 양반형 손님들의 경우에는 더욱 심했다. 어쩔 때는 계산대 앞에서 동전을 공기놀이 하듯이 흩뿌리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어느 날은 저금통을 들고와서는 그 안의 돈을 직접 셈해서 계산해 달라는 뜬금없는 요구를 마주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의 태도를 일일이 마음에 담지 않게 되었다. 그저 스쳐 지나갈 인연들일 뿐이었다. 그리고 생판 모르는 타인을 함부로 대하는 저들의 감정을 내가 책임 질 이유는 추호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아가서는 그들이 안쓰럽기도 했다. 어딜 가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감을 물건을 사 가는 이 작은 순간 속에서나마 과시하고 싶은건가라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었다. 삶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나의 몫은 아니었다. 그저 나는 저들을 좋은 본보기로 삼으면 될 뿐이이었다.

손님을 대하는 태도에 나름의 확신이 생기고 일이 손에 익으니 각양각색의 손님들이 서서히 객관적으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늘상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똑같은 물건을 사들고 나가는 손님도 더러 있었다. 그 시간이 되었는데도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마치 오랜 친구처럼 무슨 일이 있는건가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정확히 일요일 아침 7시 30분, 팩소주와 육개장 컵라면을 야외 테이블에서 호로록 먹고 자리를 뜨는 중년 남성이었다. 무슨 사연인걸까. 쓸쓸한 그의 뒷모습을 보며 어깨에 짊어져 있을 그의 삶을 생각해 보곤 했다. 그가 남긴 흔적을 치우면서 욕지기를 뱉기는 했지만. 


어서오세요, 행복을 드리는 레스토랑입니다

태풍오는 날을 좋아라 했던 적이 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홀 서빙을 할 때였다. 태풍이 오면 웨이팅이 없으므로. 태풍 이꼬르 자유였던 시절. 

뉴질랜드에 워킹 홀리데이를 가겠다며 들떠있던 스물 하나, 그 때 나는 친구와 손을 잡고 레스토랑 면접을 보았다. "손님의 옷에 음식을 흘리면 어떻게 할 건가요?"라는 질문을 무사히 통과하고 유니폼을 입던 첫 날, 홀에 나가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유니폼에 맞춰 입기 위해 정장 바지와 구두를 난생 처음 구입하던 때만 해도 나는 지옥이 열릴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행복을 드리는 ~레스토랑 입니다." 행복은 개뿔, 첫날 구두에 짓이겨진 나의 뒷꿈치에는 피가 낭자했다. 발을 절이며 손님들이 먹고 마시는걸 수도 없이 치우고, 음식물이 버려진 카트를 끌고 왕복만 수십여 차례하니 드디어 쉬는 시간이 되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쉴새없이 일하고 찾아온 첫 끼 식사였다. 

배정받은 분식집에서 참치김밥과 라면을 시키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가 무슨 호강을 누리기 위해 이러고 있는 걸까. 구두를 벗고 욱신거리는 발을 어루만지며 눈물 젖은 라면을 입에 욱여 넣었다. 그 날의 밥은 그동안의 내가 먹어온 것과는 차원이 다른 맛을 선사했다.

헬 게이트가 열리는 날의 연속이었다. 길게 늘어서 있는 웨이팅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람들이 사람들로 보이지 않았다. 가장 힘들었던 건, 화장실 체크였다. 일명 '화첵'. 화첵은 돌아가면서 담당을 배정받았는데, 50분에 한 번씩 화장실에 가 쓰레기통을 비우고 휴지를 채워넣고 물기를 닦는 일을 해야만 했다. 정말이지, 손님들이 도무지 인격을 지닌 사람이라는 존재로 느껴지지 않는 순간들이었다. 어느 날은 너무도 배가 고파서 손님들이 남긴 쿠키를 몰래 유니폼 주머니에 넣고 와서는 화첵을 하던 중에 변기에 앉아 몰래 먹곤 했다. 이러고 보니, 내 멘탈 강한 이유가 있었네. 

일이야 그렇다 치지만, 제일 힘들었던 건 역시 사람이었다. 손님을 왕이라고 배우는 서비스직이었기에, 억울한 상황에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웃어야 하는 순간들이 참 싫었다. 손님을 자리로 안내한 뒤 주문을 받을 때는 일명 '개 자세'라는 쪼그려 앉는 자세를 교육받을 정도였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러한 저자세를 당당하고도 무례하게 누리려 하는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꽤나 많았다. 셀프 바가 있는데도 물을 떠오라며 호통을 치던 사람, 접시를 치우지 못하도록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 사람, 말없이 쓰레기를 손에 쥐어주고는 떠나는 사람 등등. 참 세상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존재하구나를 뼈저리게 알게된 순간들이었다.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아요 

돌이켜 보면 그 순간을 살아온게 내가 맞나 싶을 정도로 그 때의 내가 생소할 만큼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또 다시 생각해 보면, 세상에 맞서기 위한 내 스스로의 울타리는 이러한 비극들에 비례하여 점차 단단한 철옹성으로 뒤바뀌어 가고 있었던 듯 싶다.

자신의 세계관과 사회상에서 꽤나 벗어나 있는 다양한 사람들. 좋든 싫든, 우리는 그들과 함께 어우러져 일을 해내야만 한다. 그냥 하는 게 아니고, 꽤나 잘 해내야 하기 때문에 힘들다. 싫으면 피해도 되었던 학창 시절의 둥지를 떠나 스스로의 삶을 감내해야 하는 어른의 길로 들어섰으니까. 

회사의 현실을 감당하기 어려워하는 많은 동료들을 보노라면 문득 내 어린 시절의 눈물들이 한없이 고마워질 때가 있다. 낯선 타인을 싫다는 감정이 아닌, 그저 다양할 뿐이라고 건조한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생각의 폭은 지금 당장 돈으로 사려해도 살 수 없는 거니까.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인성은 알바에서 배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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