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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May 01. 2022

그 날의 운동장

대학원, 그 지난했던 나날의 기억 

귓가에 스치는 바람소리- 누가 따라오지 않는데도 달음질치는 내 걸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 바로 들어갈까? 스산한 어둠을 비집고 철문 앞에 섰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요동치는 마음 탓에 한걸음에 건물을 다시 나와 버렸다. 


모래알 하나하나 모두 발끝으로 짓이겨 보겠다는 심정인건지 유난스럽게 긴 산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둠이 자욱한 하늘. 꼭 내 미래 같네. 인생은 도심 하늘 속에 어딘가 있을 별을 찾아보는 일과도 같을 수 있겠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리 힘들게 찾은 별마저 인공위성이면 어떡하지?

상념이 상념의 꼬리를 물고 저벅 저벅. 수없이 돌고 있는 운동장 한복판에는 희뿌연 물체가 요리조리 계속해서 헤엄치고 있었다. 저게 보이기는 하는 걸까. 공을 사이에 두고 힘찬 소리를 내며 골대로 직진하는 아이들. 저들은 골대가 있어서 좋겠다. 눈에 보이는 목표가 있는 거니까. 한없이 침체되는 마음의 무게를 홀연히 짊어진 채 계속해서 걸었다. 

가로등 불빛아래 그림자를 좇아가며 아직은 오지 않은 미래를 그려본다. 히라가나를 외우기 위해 흰 종이에 검은 획을 수도 없이 그려내었던 학부 4학년 시절. 나는 내가 뛰어난 사람인줄로만 알았다. 학사 앞에 ‘학’자만 바뀌어가는 과정일 뿐인데, 그 시간들이 나라는 존재를 우주의 하찮은 먼지로 느끼게 할 줄이야, 정말 몰랐다. 늦은 밤 홀로 모니터 앞에 앉아 깜빡이는 커서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 정말 나는 논문을 쓸 수 있는 걸까? 400년도 넘는 과거,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생을 살았을 그들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로 바꾸는 작업이 나는 그저 신이날줄만 알았는데. 아니, 어떻게 보면 어려운 게 당연한 것일 수도. 


오늘의 끝도 없는 방황은 교수님이 던져 준 종이 뭉탱이로부터 비롯되었다. 남은 시간은 고작 10시간.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로다. 라는 푸념을 할 도리밖에 없었던 그 충격적인 논문의 자태 속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할 수 있지?” 별안간 벼락을 맞은 듯 머리는 댕댕 울렸지만 내 흔들리는 동공에도 교수님은 그저 연구실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어떻게 일본 논문 발제를 반나절 전에 내어주실 수가 있는 건가요?

숱하게 일본 논문을 읽어온 터라, 그래 난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은 저녁 한 술을 뜰 때뿐이었다. 그 뒤로는 밥을 먹는 족족 식도에 정체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고, 결국 허기진 배도 만족스럽게 채우지 못한 채 가슴 가득 불안을 안고 나왔다. 그런데 웬걸. 부담은 하늘을 찌를 듯 했지만 너무도 들어가기 싫은 연구실. 그리고 갑자기 시작된 터무니없는 먼 미래에 대한 걱정.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문송합니다’를 열심히 외치는 가난한 나날이 지속되면 어떡하지? 일본 논문 하나 발제하는 것도 이렇게 심장이 떨리는데 난 정말 내 이름 석 자가 콕 박힌 논문을 완성할 수나 있는 걸까? 

이제는 무릎이 아려올 정도였다. 몇 바퀴를 돌았을까, 더 이상 없는 시간을 어두운 모래바닥위에서 축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연구실에서 밤을 지새우는 게 죽기보다 싫어 짜증이 목 너울에서 출렁이는 기분이었지만 별 수 없었다. 


결국 다시 마주한 철문. 끼익- 흐느낌 같은 문소리를 마주하며 결국 자리를 털고 앉았다. 타임워치를 꾹 누른다. 논문 주제는 400여 년 전인 임진년, 조선에서 벌어진 전쟁에 관한 것이었다. 섬을 박차고 나와 반도로 질주한 일본군은 20여일 만에 한양 땅을 밟았다. 그 뒤로 함경도로 진군한 장수, 가토 기요마사 이야기. 마침내 일본 고어가 나오기 시작하고 눈은 뻐근해진다. 하지만 제한된 시간 때문에 한 치의 휴식은 용납될 수 없었다. 

마지막 글자를 타이핑하고 그대로 의자 위에 무너져 내렸다. 9시간 30분 10초.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타임워치 위의 숫자들. 그 때 창가에 어스름하게 들어오는 햇빛, 그 구원과도 같은 광경을 찰나의 순간 맛보고 스르르 전사해버렸다. 



그러한 나날들. 벌써 4년은 족히 된 과거의 숱한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지탱해 주고 있다는 생각에 가끔은 뭉클해진다. 회상 속에서도 생생한 순간들. 커서의 깜빡임 속에서 끊임없이 뒤채였던 수없는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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