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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유 Feb 08. 2021

박물관 공무직, 월급은 얼마나 될까

작고 소중한 통장 속 이야기

전공이 뭐냐는 물음에 '역사'라고 답하면, 돌아오는 표정은 늘 한결같다. 자본주의가 군림하는 시대에 역사를 먹고살 길로 택한 대범함에 대해 경이로움 내지 걱정이 스쳐가는 얼굴들. 애초에 돈을 생각하고 전공을 정하지는 않았다. 꼭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자는 낭만에 가득 차 있었던 학창 시절을 호기롭게 보내고 나니, 나는 역사학도가 되어 있었다. 인문학 전공자에게는 한없이 각박한 사회라, 눈물이 앞을 가리울 때도 있으나 나는 큐레이터가 되어 꽤나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비록 '공무직'일지라도. 

번쩍번쩍 윤이나는 외관과 내관,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쾌적한 환경. 그 안을 누비는 수많은 직원들. 박물관을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궁금해했을 것 같다. 박물관 사람들, 돈 얼마나 벌까?



각양각색의 박물관 사람들


  사실 박물관의 직원들 모두가 '큐레이터'는 아니다. 박물관이 아무리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 비영리기관이라고 해도 엄연히 '회사'이다. 여러 행정업무를 수행하는 직원들은 물론, 박물관 시설을 관리하는 직원들도 있다. 하지만 그중에도 박물관의 주축을 이루는(어떠한 위계를 부여하는 건 아니지만) 직원들은 단연 '학예업무'를 수행하는 이들이다. 

  학예업무는 크게 유물, 전시, 교육, 학예로 나뉜다. 박물관의 존재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유물이다. 애초에 쌓여가는 옛날 물건들을 어떻게 폼나게 보관할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게 박물관이니까. 소장하고 있는 유물을 어떻게 관리할 것이며(유물), 이 유물들을 어떻게 솎아서 대중에게 내놓을지 고민(전시)한다. 나아가 학교에서는 접할 수 없는 박물관 특유의 교육 과정을 개발해 내거나(교육), 때때로 유물과 전시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 결과물을 내놓는다(학예).

  흔히 우리가 '큐레이터'로 알고 있는 이들이 바로 이러한 업무들을 수행한다. 하지만 큐레이터라고 모두 같은 '큐레이터'는 아니다. 박물관 진로를 고민하는 이들은 종종 큐레이터, 학예사, 학예연구원의 차이를 묻곤 한다. 실제로 큐레이터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큐레이터, 학예사, 학예관, 학예공무원, 학예연구원, 연구원 등. 

  큐레이터는 학예사와 같은 말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명칭에 대한 여러 혼선이 빚어지고 있는 이유는 큐레이터 모두가 '정규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큐레이터는 크게 세분류로 나뉜다. 공무원, 정규직, 비정규직. 

  흔히 학예공무원이라 불리는 '공무원' 큐레이터는 정규 시험을 통과하여 큐레이터가 된 사람들이다.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등의 기관 시험이나 서울시, 인천시, 경기도 등 지역 시험의 문턱을 통과한 이들이다. 

  한편 박물관 내 '정규직' 큐레이터도 있다. 박물관은 국립, 공립, 사립으로 나뉘는데, 기관별로 사정은 조금씩 다르지만 각 박물관 내에서 정규직 TO로 큐레이터를 뽑는 경우가 있다. 이들이 바로 정규직 큐레이터이다. 

  마지막으로 '비정규직' 큐레이터. 흔히 공무직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바로 여기에 속한다. 박물관 공무직 학예사. 공무원을 방불케 하는 명칭 때문에 묘한 안정감도 안겨주었지만, 결국 무기계약직이었다. 원래 박물관은 2년 계약직으로 뽑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고용안정을 위해 '공무직'이라는 이름의 무기계약직으로 대부분 대체되었다. 간혹 육아 대체 인력을 뽑기도 한다. 




가방 끈 꽤나 길지만, 비정규직입니다 


  박물관 공무직이 없던 시절, 인력이 순환될 수 있기 때문에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공무직은 정년이 보장된 무기계약직이기 때문에 공무직이 된 이들은 해당 박물관의 '박힌 돌'이 된다. 박힌 돌은 절대 빠져나오지 않는 법. 

  해마다 박물관에서 일하기를 꿈꾸는 이들이 거금의 돈을 대학에 바쳐 석박사를 졸업한다. 하지만 각박한 박물관 인력 시장에는 절망과 원성만이 가득하다. 육아 대체 인력을 구하는 공고의 조회수는 몇 천을 상회할 정도다. 국립 박물관의 공무직에 지원하는 사람들 중에는 석사를 넘어 '박사'도 많다. 자본주의가 판을 치더라도 나만의 신념을 가지고 '영끌' 공부했건만, 현실은 날마다 채용공고를 들여다보며 속을 새카맣게 태울 수밖에 없다. 


통장에 찍힌 그 숫자, 실화인가요?


  나는 다행히도 운이 좋았다. 석사를 졸업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박물관의 '박힌 돌'이 되었으니 말이다. 한 땀 한 땀 눈물로 써 내려간 석사 논문에 대한 보상을 꽤나 빨리 받게 되는구나, 나를 받아준 박물관에 '백골이 진토 되어', 정말 뼈라도 묻고 싶을 정도로 열심히 일하고 싶었다. 

  3개월 험난했던 시보기간을 마치고 나는 4개월 차 월급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하지만 인고의 시간 끝에 내 통장의 찍힌 그 숫자는 정말 꿈이라고 믿고 싶었다. '200'도 아닌, 아니 심지어 180도 안 되는 숫자가 적혀 있는 걸 확인하고는, 정말 심각하게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된 한 끼 식사를 하려면 만원을 줘야 하는 세상에서 이 정도 티끌만 한 월급으로 60년을 살겠구나 생각하니 한없이 아득했다. 한 학기당 500만 원 상당의 석사 등록금이 뇌리에 스쳐갔다. 자대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장학금을 후하게 받았기에 학자금 빚이 없다는 사실이 씁쓸한 위안감을 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대체로 모든 박물관 공무직의 월급은 200을 넘지 않는다. 통장에 찍힌 초현실적으로 적은 숫자와 으리으리한 박물관의 외형이 참으로 모순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박물관을 다니는 이유


  사실 박물관이 아닌 다른 진로를 택한다고 할지라도 역사를 전공한 이상, 주머니를 두둑하게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고등학교 시절, 존경했던 근현대사 선생님께 눈을 빛내며 역사를 전공할 것이라는 의지를 천명하자, 선생님이 해주신 말이 문득 떠오른다. "인생 망칠 일 있니?"

  예상치도 못한 선생님의 반응에 어린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노동자의 숙명을 타고난 이상, 노동은 내 삶의 1/2, 적어도 1/3을 차지할 게 자명한데 그 시간들을 내가 싫어하는 일로 채워야 하는 삶이라니, 나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때부터 10여 년이 흐른 지금의 나는 꽤나 세상의 때가 묻었다. 꿈에 부푼 어린 학생에게 매몰차게 현실을 꾸짖어 줄 수밖에 없었던 선생님의 마음을, 서른의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그때 선생님은 임용고시를 패스한 정규직 역사 선생님이 아니라, 기간제 교사였으리라. 

  하지만 만약 지금의 나 그대로, 19살로 돌아가 선생님을 마주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천진하게 역사를 전공하겠다고 말할 것 같다. 근현대사 교과서 속 빛바랜 사진들을 채우던 수많은 사람들의 갖은 사연들이 너무나도 궁금하던 시절이었다. 학부, 대학원을 거쳐 다양한 시대를 살아내었던 사람들의 무수한 이야기들을 돌아보았다. 이들은 나에게 돈,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을 수 있는 삶을 일러주었다. 

  돈, 많으면 좋겠다. 쇼핑할 때 긁는 카드 소리를 너무도 사랑하는 나이다. '그깟 돈, 엣 헴', 절망 어린 삶을 비범함으로 가장하고 싶어 하며, 자존심에 이를 바득 바득 가는 처량한 다짐이 아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언젠가, 필요한 만큼의 돈을 성취하게 될 수 있으면 좋겠다. 각박한 세상 속에서 촌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우리 모두가 돈이 되지 않는 것들에, 좀 더 가치를 부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역사와 문화를 향유하며 험난한 현실 속에서 잠시나마 마음 만은 풍요로워지기를. 이러한 일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어찌 되었든 나는 적은 월급으로 청년 주택에 당첨되었으니, 이만하면 꽤나 선방한 사학도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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