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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Mar 02. 2021

박물관계의 6두품, 공무직

공무직의 유리천장은 깨질 수 있을까?

한국사를 접해본 적이 있다면 신라시대의 악명 높은 신분제도, '골품제'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1000여 년도 더 지난 일이건만, 6두품의 대명사 최치원의 눈물 젖은 시조를 보노라면 남일 같지가 않다. 능력의 여하와 무관하게 한정된 범위 내에서의 승진만이 허용되는 6두품의 설움은 박물관 공무직의 한숨과 많이도 닮아있다. 


공허한 사다리의 원칙

  바야흐로 취직이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는 시대이다. 하늘의 별이라니, 다소 과장된 듯도 하지만 현실이다. 수능과 대입, 사회가 원하는 절차를 다 밟고 올라와 숨도 고를 새 없이 스펙을 쌓고 독창적인 자소설 창작을 거쳐 면접의 허들을 넘는다는 게 결코 쉽지는 않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인문학 전공자인 나는 자괴감을 넘어 일종의 죄책감마저 느꼈다. 취직이 잘 된다는 과에 들어가 하루하루 정진하기도 아까울 시간에, '맹자왈 공자왈'하는 격이었으니 남들 보기에 한심하기까지 할 수 있는 역사학 전공자였기 때문이다. 단지 인류가 걸어온 궤적을 좀 더 사유해 보고 싶었을 따름인데, 고개를 푹 숙이고 '문송합니다'를 중얼거려야만 했다. 

  하지만 운이 좋았다. 그 흔한 복수전공도 하지 않고 패기 넘치게 '인문학 대학원 사학과 석사'졸업까지 마쳐 취업과는 요원해질 대로 요원해진 상태였지만, 가까스로 박물관 안에 엉덩이를 붙일 수 있었다. 게다가 박물관은 '공공기관'이 아니던가. 문송한 과거는 안녕, 역시 좋아하는 일을 밀고 나가면 뭐라도 되긴 되는구나라는 자기 확신과 함께 공공기관에 취업했다며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마구 샘 솟았다. 

  며칠간 방방 뜬 마음으로 주변에 박물관 취직 사실을 알렸다. 꽤나 반응이 좋았다. 무려 '공공기관' 아니던가. 하지만 그 뒤에 타래로 딸려오는 말에 당황하고 말았다. "정규직이야?"

  정규직이 흔치 않은 우리네 현실에 당연한 팔로우 퀘스천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던 것 같다. 박물관 공무직을 검색해 본 것은. 공무직은 공무원과 비슷한 이름과는 무관하게 정규직과는 엄연히 다른 직렬이었다. 정년은 보장되지만 승진과 호봉은 없었다. 매년 올라가는 최저시급에 따라 통장에 찍히는 액수가 조금씩 달라질 뿐. 그 현실을 보자마자 6두품 최치원의 시조가 눈에 아른거렸다. 


가을바람에 괴롭게 시를 읊노라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이가 드물구나 

한밤중 창 밖엔 비가 내리는데

등불 앞에 있는 마음은 만 리 밖을 달리네 


-최치원, 추야우중- 


  당나라에서 뛰어난 인재로 인정받은 후 야망을 품고 신라로 귀국했지만 신분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야속한 현실을 깨달은 그는 평생을 방황했다. 물론 21세기 현대 박물관 공무직의 현실을 1000여 년도 지난 신라사회의 신분제도와 등가 시키는 건 무리수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능력과 재능에 따라 밟고 올라갈 수 있는 '인정의 사다리'가 없다는 사실은 무섭게도 닮아 있었다. 정말이지,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가 대번에 확 꺾여버릴 수밖에 없었다.  



정규직이라는 희망고문 앞에서


  그 뒤로 박물관 취직 사실을 전할 때는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딸려 나올 수도 있는 '정규직 여부'의 물음 때문이었다. 공무직도 포괄적인 의미에서는 정규직임에는 분명했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정규직과의 차별성 때문에 떳떳하게 정규직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왠지 모를 뻘쭘함이 있었다. 그렇다고 공무직의 뜻을 이러쿵저러쿵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름 열심히 하여 얻어낸 자리였건만, 마음 한 켠에 자리 잡은 공무직이라는 타이틀의 찜찜함은 나를 한없이 작게 만들었다. 인서울이긴 하지만 메이저 대학이라고는 할 수 없는 애매한 나의 출신 대학과 마찬가지로, 공무직이라는 직렬은 나의 부족함을 방증하는 꼬리표 같았다. 나의 노력 여하와는 무관하게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결과물들이 나를 보여준다는 생각에 한없이 초조해져만 갔다. 

  공무직이라는 모호한 직렬은 가끔씩 일하는 중에도 문제가 되었다. "공무직인데,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 승진과 호봉에 족쇄가 채워진 직렬에 불과한데 영끌하여 일하고 싶지 않다가도, 열심히 하여 정규직이 되고 싶은 욕심이 고개를 들기도 했다. 

  같은 공무직 직렬 사이에서 미묘한 기류가 흐를 때도 있었다. 직장 내에는 공무직으로 근무하다가 다시 면접을 거쳐 정규직이 된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일말의 가능성 앞에서 동료는 나의 경쟁자가 될 수도 있었다. 정규직이라는 희망고문 앞에서 덤덤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피를 튀겨가며 쟁취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정규직이라는 타이틀을 포기하기에는 현실이 너무도 누추했다. 



또 다른 신분상승의 기회, 학예연구사 시험


  정규직 외에도 신분상승의 방법은 또 있었다. 바로 학예연구사 시험이다. 학예연구사 시험의 응시자격은 관련 전공 석사 졸업 이상이며, 종류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과목은 한국사, 세계사, 박물관학 이렇게 3가지이다. 

  박물관 공무직 누구에게나 (앞으로도 박물관에 뜻이 있다면) 학예연구사 시험 준비는 '디폴트'이다. 언제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항상 준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마음의 응어리로 남아 있다. 

  공부는 쉽지 않다. 광범위한 세계의 역사에 통달해야만 풀 수 있는 '초'지엽적인 문항들이 난무하는데, 공부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주경야독이 모두에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하루하루 합격자 수기를 읽어 내려가며 내가 올라가야 할 사다리의 높이를 가늠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저 올라가지 않고 내 자리에서 행복할 수는 없는 것일까. 끊임없이 위로 올라갈 것을 종용하는 사회 속에서 반항의 깃발을 들어 올리고 싶었다. 내가 부족하다는 자각과 더 많이 쟁취해야 한다는 초조함과 결별하고 싶었다. 

  



공정하다는 착각


  그렇다고 해서 주변에 공무직의 설움을 맘 터놓고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박사과정을 선택한 친구, 아직 취업을 하지 못한 친구, 수도권 취업에 실패하여 강제로 지방에 유배되어 계약직과 육아 대체인력을 전전하는 친구 등등. 이밖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힘든 삶들이 있을 테였다. 

  앞에서 박물관 공무직을 '6두품'에 비유했지만, 6두품과 관련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바로 6두품이 골품제 두품 층에서는 최상위권이라는 점이다. 6두품에게 진골과 성골은 올라설 수 없는 '스카이캐슬'이었지만, 6두품 역시 일반민들의 관점에서는 엄청난 기득권 세력이었다. 진골, 성골이 재벌이라면, 6두품은 대기업 및 기타 등등 '사'자 집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최치원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울분 가득한 시조를 많이도 남겼지만, 역사에는 이름 석자는 물론이고 존재조차 알려지지 못한 무수한 아무개들이 있다. 

  한없이 줄 세워지는 사회 속에서 나 역시 위에만 쳐다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얻어낸 것들, 혹은 얻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시간이 가용했다는 사실 자체가 나도 모르는 나의 기득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그렇다고 아래를 보며 내 현실을 자위하자고 하기에는 이 사회와 현실이 너무도 비정해 보였다.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수단으로 위안을 삼자니, 인류애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 아니던가.  

  이러한 고민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을 무렵이었다. 무심코 들린 서점에는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제목의 책이 산재해 있었다. 마이클 센델의 신작이었다. 책의 제목이 마음을 확 끌었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라니,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현실이 자명했다. 

  책에서 마이클 센델은 말했다. 모두가 공정한 출발선만을 고민하고 있다고. 하지만 중요한 건, 아무리 출발선을 고르게 맞추더라도 '성공의 방정식' 앞에서는 '실패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공정한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기회를 제대로 짚지 못한 낙오자들은 변명의 여지도 없다. '너의 재능과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재능이 재능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도 '시장의 원리'에서 연원 하는 게 아니던가. 

  다시 말해 사회가 이야기하는 성공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리 출발선이 공정해도 그 자체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 모두가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하든, 모두가 어느 지위에 있든, 무슨 일을 하든, 그 자체로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하지 않겠냐고 센델은 말한다. 

  책을 읽고 상당히 위로받았다. 우리는 늘 노력을 강요당한다. 딛고 있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내고자 모두가 노력한다, 그리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고는 도달한 현재 앞에서 사회적으로 떳떳하지 못할 때 많은 이들이 스스로가 죄인인 마냥 그저 땅을 바라만 보고 있다.

  모두가 떳떳한 사회가 오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다. 박물관 공무직의 유리천장이 산산조각이 날 수 있는, 아니 애초에 그러한 천장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왔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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