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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May 07. 2023

일장춘몽

3년 반, 짧지도 길지도 않은 박물관 공무직의 시간을 돌아보며

날이 찼다. 가만히 서 있어도 콧물이 찔끔 흘러나오는 그런 날이었다. 살을 에는듯한 추위 속 많은 사람들이 뜻밖의 장소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추위를 이겨내려 발을 동동 굴러 보기도 하고 저마다 이야기 꽃을 피워보기도 한다.

30분 정도 흘렀을까. 그제야 교수는 모습을 드러냈다. "미안합니다." 사무적인 인사를 건넨 교수는 스무 명 정도의 사람들 앞에 위풍당당히 섰다. 미안하다는 말과는 달리 곧바로 태세를 전환한 그의 앞에서 사람들은 당황할 틈도 찾지 못했다. 그의 긴 해설이 시작되었다. 비로소 기다림의 장소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사람들의 기대는 무참히 무너졌다. 다시 20분 정도가 지체되었다.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다. 두서없는 그의 해설에 공감도, 이해도 할 수 없지만 모두가 교수의 권위 앞에 순종했다. 그렇게 영하 20도 속 창덕궁, 창경궁 투어가 시작되었다.



불현듯 그때가 떠올랐다. 갓 졸업한 대학에 신분을 바꾸고 다시 들어갔던 그때가. 학부 때부터 알던 교수들이었지만, 대학원에서 만난 그들은 저마다의 다른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논문이라는 꼬리표를 되뇌며 어떠한 기상천외함이 날 찾아오더라도 예바른 태도와 정갈한 말투를 잊지 않는 법을 그때 배웠다.

교수는 하늘과도 같았다. 분명 그들은 대단한 존재임에 틀림없었다. 몇 백 년, 몇 천년 전의 문서를 자유자재로 읽고 다루는 그들의 모습은 가히 감탄스러웠다. 그 능수능란함은 지난한 분초의 다툼 속에서 피었으리라. 긴 세월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무겁디 무거운 그들의 궁둥이를 존경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자본주의 앞에서의 초연함은 무거운 궁둥이 스킬로만 될 일이 아니었다. 무일푼의 세월이 이어질수록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보통의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는 인문학의 고루한 진리를 알아가고 있다는 자기 암시는 현실 앞에서 서서히 깨지고 있었다.


그렇게 일본 유학을 포기했다. 쫓기듯 들어간 일터는 박물관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새로운 현실도 썩 내키지는 않았다. 자기모순 속에서 허우적대면서도 하루하루 스스로의 정체성을 온존 시키는 법을, 현실을 해탈하는 법을 새로 배우게 되었다.


조선중화주의, 대학원에서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스스로의 전문성을 일구겠다는 꿈을 안고 꿋꿋이 공부해 온 주제였다. 19세기는 '미개한' 남을 밟고 올라서는 일이 모두의 목표이자 진리로 추앙받던 시대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서쪽의 아무개가 또 동쪽의 아무개를 식민지로 삼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혼란한 시절, 조선은 홀로 태연했다. 서쪽 나라의 총탄이 이내 강화도를 꿰뚫고 수많은 이들의 피가 난무하는데도, 꿈쩍 하지 않았다. 조선은 오랑캐로 난잡한 세상 속에 조선만이 '우월한' 중화라는 정신 승리로 똘똘 무장하고 있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20세기 중반까지 세계 지도에서 지워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나는 그렇게 풀었다.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두 세기에 걸쳐 꿋꿋이 이어온 자존 의식이 결국 조선 스스로의 컴컴한 안대가 되어버린 것이라고.

임진왜란 430주년을 한창 준비하고 있던 날

20대 후반, 세 번의 면접을 겨우 이겨내고 들어간 박물관에서 나는 나 자신이 그 '컴컴한 안대'가 되어버렸다고, 자조했다. 태극기가 저마다의 개성으로 휘황찬란하게 걸려있는 각각의 전시실 안에는 공은 있었어도, 과는 없었다. 영웅은 있었어도, 비참했던 영웅 개인의 삶이나 역사를 지탱해 온 수많은 개인의 이름들은 지워지고 없었다. 빛 좋은 선전이 가득한 그곳의 녹을 받아먹으며 이율배반적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나름의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전시실 안을 동분서주하며 전시실이 간택하지 않은 수많은 진실을 읊었다. 대단치는 않지만 공부하며 절절하게 알게 된 것들을, 그를 통해 세상에 조금은 긍정정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면서. 그 시간들 속에서 가끔은 스스로를 대견해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더 자주 말도 안 되는 선민의식에 빠져 스스로를 이상한 신념의 진탕 속에 매몰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절망하기도 했다.


진실을 몰라도 세상은 순탄히 잘 흘러가고 있었다. 자기 연민에 빠진 순간들에는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프로 불편러가 되어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모르는 걸 홀로 알고 있다는 쾌감 때문에 끈질기게 수많은 진실을 파헤친 적도 많았다. 그러나 모두에게 불편할 뿐이라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영화 매트릭스 속 모피어스가 건넨 빨간약을 홀로 받아먹은 것처럼, 날마다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만 같았다.

 

1인 가구를 일구고 나서는 매달 180만 원씩 찍히는 통장도 내 숨통을 조여 오고 있었다. 의연한 태도로 고상한 진리를 절절하게 설파하기에는 나는 너무도 속물이었다. 혹은 이런 스스로를 속물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 자체가 오만하기 짝이 없다고 느낄 때도 있었다.


3년 반이 지났다. 어느 날 정부 기관은 우리에게 8억의 예산을 덜컥 쥐어 주었다. 한반도 북쪽의 국경 아닌 국경으로 마주하고 있는 그들을 적으로 멋지게 포장하라는 지령과 함께. 내 평생에 걸쳐 실물로는 볼 수도 없을 것 같은, 또 수많은 이름 모를 이들의 피땀이 고스란히 배어있을 그 돈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그 돈에 굴복하고 말았다. 지금 받는 월급에 100 이상은 얹어준다는 달콤한 말에, 지금의 직장에 새로 몸을 담았다. 역사 교과서를 기획하고 개발하는 일이었다. 고민이 많았지만 고민하지 않았다. 어디까지가 내 신념이고 아집인지 이제는 알지 못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




한참을 지나 궁궐 투어 속으로 정신이 돌아왔다. 추위를 가르며 투어를 진두지휘하는 교수는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세상이 정조를 개혁 군주로 추앙하는 게 교수는 그렇게도 불만이었다.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죽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그였다. 신하들의 손에 언제든지 헌신짝처럼 죽음으로 내쳐질 수 있다는 극도의 불안감 속에서 세손 시절을 보낸 그였다. 하루하루 할아버지 영조의 비위를 맞추며 살얼음판과 같은 시간을 견뎌 겨우 즉위한 그는 조선의 부흥을 꿈꿨다.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국 속에서 그는 어렵게 자신의 권위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뒤로는 신하에게 욕을 쓴 편지로 겁박도 해 가면서. 지난한 생을 보낸 그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생을 마쳤다. 1800년 19세기가 시작되는 바로 그 해에 거짓말처럼.

이런 극적인 서사를 세상이 가만두지 않은 것은 필연이었다. 그러나 교수의 기나긴 해설을 공감하며 듣기에는 날이 너무 추웠다. 얼어붙은 규장각 터로 사람들을 몰아붙이며 쏟아내는 그의 세상에 대한 분노는 어떠한 설득력도 갖고 있지 못했다. 더군다나 교수의 앞에서 설명을 듣는 이들 중에는 현역으로 정조 시대를 공부하는 연구자도 있었다. 아직 교수가 아닌 연구자였던 그는 조금은 억울한 표정으로 아무도 모르게 가끔씩 입을 달싹일 뿐, 교수의 권위에 반항하지는 못했다.

창덕궁 후원, 주합루

벌써 반나절이나 지나있었다. 그렇지만 교과서 대표 저자인 교수의 투어는 마무리될 줄을 몰랐다. 입사한 지 이제 막 두 달이 지나가는 시점이었다. 무서운 속도로 피어오르는 수만 가지의 사유들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풍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매서운 추위 속 쾌청한 궁궐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래, 아름다우니까 되었다. 좋아하니까 되었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는 말자고, 이제 갓 서른둘이 된 나는 조금은 세상의 때가 묻었고 아직도 조금은 미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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