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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Aug 06. 2023

편집자 브이로그

역사 교과서를 만들어 가는 하루

오늘은 재택 근무 날이다. 오전 7시 반, 몸이 천근만근이지만 정신력을 끌어 모아 이불을 박차고 나온다. 피곤함에 엉키는 걸음걸음, 고양이 세수를 어푸어푸 마친 뒤 옷을 주섬주섬 입는다. 


집에서 바라본 밖의 전경


산산하게 부는 바람이 조금 남아있던 잠을 훌훌 털어 준다. 아파트 3층에 위치한 필라테스실. 선생님은 어김없이 밝은 미소로 맞이해 주지만, 난 늘 저 웃음이 두렵다.

몸은 처절한 영혼의 명령을 전혀 듣지 않는다. 특히나 곤혹스러운 건 척추를 하나하나 자리에 뉘이라는 것과 같은 말들. 아니 척추도 신경으로 통제가 되는 곳이었던가.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생님은 한결같이 ai 미소를 짓고 있다. 선생님의 온화함과는 완전 딴판인 내 꼴이 점점 우스워진다. 경운기처럼 달달 떨리는 온 근육과 비오듯 흐르는 땀은 민망함을 배가한다.

어찌 저찌 시간은 흐른다. 드디어 끝났다는 안도감이 거짓말처럼 큰 행복을 불러 온다. 샤워 부스에서 물을 맞으며 그래, 이 맛이지, 바로 다음 지옥문을 예고해 버리는 자신의 성실함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재택 근무를 하기 전 커피를 내리는 일은 루틴이 되었다

오전 9시 30분, 출근 체크를 한 뒤 정성스레 커피를 내린다. 오 나 자신 좀 멋진데? 역시 브이로그로 성공할 운인가, 골백번도 더 했던 망상에 다시 빠져 있기도 하다가 얼음을 동동 띠운 컵을 들고 이내 자리에 앉는다.


찰나의 여유를 비웃기라도 하듯 업무가 빗발친다. 연거푸 업무를 쳐내는 와중에 오늘날의 현실이 어릴적 즐겨하던 넷마블 타자 게임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뇌 한 켠에서 스친다. 주어진 문장을 제 시간 안에 타자로 치지 못하면, 상어가 우글우글한 바다에 빠져 버리는 섬뜩한 게임. 사수의 불호령을 피하기 위해 온 신경을 기민하게 곤두세우며 매뉴얼에 맞추어 텍스트를 한땀 한땀 빚어내다 보면 오전 11시 40분, 벌써 점심시간이란다.



인절미 그릭 요거트

요거트를 퍼먹는다. 나름 운동을 하고 있으니, 단백질을 채워 보겠다는 심산이다. 식사 후 5-10분의 릴스 감상으로 뇌를 식혀 주고는 집을 박차고 나가 뙤약볕에 산책을 한다. 재택하는 날은 조금이라도 걸어야 한다는 스스로의 고집 혹은 아집 때문이다. 땀을 삐질 흘리며 머릿 속으로 아까 다듬은 문장들을 곱씹어 본다. 그렇게 산책이 끝나면 23층까지 다시 계단을 오른다. 뚠뚠하게 연마한 엉덩이의 근력은 편집자의 힘! 숨을 헐떡이며 자기 체면을 건다.


오후 1시,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자세를 곧추세우고 다시 업무를 시작하려던 찰나 띵동 메신저가 울린다. 뭔가 쎄-하다. 열어 본 메신저는 역시나였다. “편집자님, 남명 조식을 기념하는 기관에서 우리 대표님께 직접 편지를 보내셨네요. 교과서에 남명 학파의 이야기가 소략하다고 꼭 실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에요.” 맙소사. 올 것이 왔다. 민원. 남명 조식의 철학을 수놓은 수행용 수건도 선물로 함께 보냈다는 전갈이 이어졌다.


재단선에 맞추어 교과서의 텍스트를 늘리고 줄이느라 여념이 없는데. 조사 어미 하나 허투루 썼다간 전혀 딴판의 의미가 되어버리는데. 통으로 내용을 추가해 달라니.. 여러분, 이게 '사랑’만으로 될 일이 아니에요(조식을 기념하는 기관의 이름에는 사랑, 두 글자가 들어가 있었다). 교과서 속 한 줄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란 말이에요.


일전에 문화재청 산하 기관에서도 정유재란 내용이 소략하다며 민원을 넣는 바람에 본문을 수정하며 애를 먹은 적이 있었다. 짜증으로 살짝 골이 당겨 왔지만 차분히 민원의 내용을 읽어 본다.


음 타당하다 타당해. 남명 조식…. 15세기를 주름 잡았던 유학자. 조식은 늘 몸에 칼과 방울을 차고 다니며 허무맹랑한 탁상공론보다도 실천이 중요하다 역설했다. 왜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이미 세상에 없었지만, 그의 제자들이 너도 나도 이곳 저곳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붉은 옷을 휘날리며 일본군을 휩쓸었던 홍의 장군 곽재우가 그 대표격이었다.


이처럼 화려한 계보에도 조식은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게 현실이었다. 율곡 이이와 퇴계 이황은 각각 오천원, 천원의 주인공으로라도 잘 알려져 있는데. 조식은 그 이름 두 자조차 생소할 뿐더러, 그의 제자들이 의병의 전적을 바탕으로 광해군 때는 정국을 휘어 잡았다는 사실 등등은 전공자가 아니면 알기 어려우니까.


그런데 이것 참, 난감했다. 얼마 전 저자 회의에서는 경상도 의병만을 주목하고 전라도에서 일어난 의병을 등한시해 왔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 말에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전라도를 점령하려 했던 탓에 전라도에서 많은 의병이 일어났지만 잘 다뤄 오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기존 교과서에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던 곽재우 그림을 호기롭게 빼버렸건만...


오후 4시, 고민이 이어졌다. 온국민이 보는 교과서의 그 한줄 한줄의 힘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기에. 누군가의 지적 때마다 쉽사리 모든 걸 수정하기에는 큰 부담이 따랐다. 아 넣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분주히 학계의 동향을 살피고 자료를 뒤지고 뒤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결국 왜란 파트에는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고경명의 사료를, 광해군 파트에는 조식의 제자들에 관한 서술 한 줄을 추가하는 것으로 공평하게, 일단락하였다.

다사다난한 오늘의 일과는 이상으로 이상 무!



받은 수건을 두르고, 사무실에서

오후 7시, 아침에 일어난 뒤부터 번개불에 콩 구워 먹듯이 지나가버린 하루를 실감하며 호로록 홀로 차린 밥상을 비운다. 역사란 순간을 살며 어떻게든 그 순간을 붙들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이 가장 여실히 녹아있는 학문이 아닐까, 하얗게 불태운 오늘을 나만의 여과지에 담아내 본다. 아니 근데 그걸 왜 대표한테 보내면 뭘 해, 교과서를 만드는 실무자한테 보내야지. 을보다 갑을 중시하는 습성은 양반 문화에서 연원한 건 아닌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조금 서운해 하기도 하면서.



일과가 끝나면, 한강대교에서 자주 산책을 하곤 한다

오후 9시, 어슴푸레 땅거미가 진 거리를 거닌다. 어떻게 나의 시절이 흘러 흘러 이 곳까지 왔구나. 홀로 터덜터덜 걸으니 못말리는 감성파가 되어버린다.


별별 생각이 꼬꼬무 이어지다가 문득 중학교 때의 그 날이 펀뜩 떠오른다. 역사 시간, 어쩜 그렇게 핵심만 꼽아 밑줄을 긋냐며, 선생님은 모두의 앞에서 내 교과서를 흔들며 멋쩍은 칭찬을 해 주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그 시덥잖은 사건이 날 오늘날의 길로 인도했다.


한줄 한줄 밑줄을 그어가며 읽어 내려야만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던 어려운 문장들. 그 시절의 그 문장을 오늘의 내가 한줄 한줄 만들어 가고 있다.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의 일상을 바꾸어 버릴 수도 있는 그 문장들을.


가만 보면 인생은 참 덧없는 것 같으면서도 돌아 보면 문득 그 모든 순간 순간들이 소름끼치게 유의미한 것 같기도.


하루 하루를 붙들고, 이렇게 진국으로 살아내다 보면, 또 내일의 내가 과거가 되어버린 오늘에 새로운 숨을 불어 넣어 놓겠지.


그렇게 실없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꽉꽉 채운 오늘을 후련하게 흘러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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