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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Mar 04. 2023

바선생의 철학

층층이 쌓여있는 불평등, 혹은 착각에 대하여

안녕하세요, 바선생님 


  평화롭지만 평화롭지 않은 오후였다. 극도의 “I”스러운 감성으로 오늘도 집 밖을 한시도 나가지 않겠다던 다짐이 무색하게 난 집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바선생과의 첫 만남은 그렇게도 가슴 벅찬 경험이었다. 


  부모의 서포트를 바란 적은 없었다. 그저 그럭저럭 스스로의 존재를 수용한 채 무던히 살아가고 있는 나를 방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 날도 그랬다. 무심하게 찾아온 일상적인 불행은 목이 매일 정도의 짜증을 낳았다.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애꿎은 인형을 침대로 던져버리곤 체념한 채 의자에 풀썩 앉아버렸다. 그때였다. 꺅- 소리를 지르고 싶은 욕구를 바선생이 해결해 준 것은. 발끝으로 전해지던 은밀한 감촉,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실이건만 차마 믿을 수 없었던 그 충격적인 자태. 맹렬하게 벽을 향해 꿈틀거리는 이질적인 생명. 


  그 후 약2시간의 기억은 가물가물 떠오르지 못했다. 아연실색한 얼굴로 바선생을 독대한 나는 그 날의 불행이 가져온 분노마저 삭혀버렸다. 떨리는 마음으로 바선생의 국적을 알아보던 그 때의 내 마음에는 오로지 한 가지의 희망만이 떠올라 있었다. “제발, 우리집을 상시 거처로 생각하진 말아주세요.” 다행히도 그 날 접견한 바선생은 실내 취향이 아닌 터라, 크게 안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온 몸을 떨어가며 C사의 정기 케어를 신청했다. 인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부터 지구의 안주인이었던 바선생의 위용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었다.



신의 룰렛 앞에 선 초라한 생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에 큰 비가 왔다. 바선생과의 첫 만남 이후 난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지 않을 일을 상상하며 식은 땀을 훔쳤다. 그 날도 막연한 상상 때문에 유독 잠을 못이루고 있었다. 늦은 밤 릴스를 보며 마음을 달래던 나는 뜻하지 않게 바선생과 재회했다. 이번에는 괴성을 지르진 않았다. 그들과 나 사이엔 폰 액정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영상 속 바선생 군단은 암흑과 같은 폭우 속에서 힘차게 물을 가르고 있었다. 시커먼 몸체를 번득이며 줄지어 가는 그들의 군열에 사람들은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양 갈래로 길을 터주었다. 

  강남, 하염없이 땅 값을 불리기 위해 비정상적으로 매워진 그 땅에서 바선생과 함께 일부 사람들이 생을 마감했다. 하늘이 내린 그 차가운 물 속에서 그들의 시신을 지킨건 바선생 뿐이었을까. 땅 속에서 살았던 그들은 오래 전부터 바선생과 두터운 관계를 맺고 살아왔을 지도 모른다. 종말로 이르는 길마저 바선생이 인도해주었다는 사실에 그들은 실소했을까. 아니면 더는 익숙한 불행을 지속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했을까. 



층층이 쌓여있는 불평등, 혹은 착각


  “가끔은 제가 여기 있으면 안되는 존재처럼 느껴져요.” 무용한 죽음을 조롱하듯이 계절은 무던히 지났다. 쌀쌀해진 날씨에 잠깐 몸을 덥히려 카페에 나왔을 때였다. P의 얼굴은 유난히 지쳐 있었다. 실없는 농담으로 자주 사무실의 공기를 뒤바꾸던 P가 정색을 하고 앉아 있으니 마음까지도 추워지는 것 같았다. 평소 웃음이 해프다고 생각해서 남몰래 조금은 P를 만만하게 여겼을 지도 모르겠다. 깊어가는 이야기에 발 맞추어 한없이 진중한 고민을 늘어놓는 그의 앞에서 나는 오만했던 나의 편견을 곱씹으며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P는 180만원도 되지 않는 월급인데, 사람들이 외제차를 끌고 다니는 모습을 볼 때면 스스로가 한없이 작아진다고 했다. 태어날 때부터 나와는 달랐던 그들과 함께 같은 공간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노라면, 그렇게 자신이 싫어지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한동안 푸념을 늘어놓던 P가 문득 화제를 전환했다. 어제 집에서 바선생과 닮은 무언가를 발견한 것 같다고. 그의 얼굴은 이제 거의 잿빛이 되어 있었다. ”도대체 왜 사는 지 모르겠어요.“ 바선생의 이야기에 반갑게 맞장구를 쳐주지 못한 건 나와 달리 P는 C사를 부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문득 뇌리에 지나간 기억이 스쳤다.



  “부모님이 비싼 돈 주고 대학원 보내줬는데, 그 아까운 시간에 일을 하면 어떡해. 한 자라도 더 봐야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내게 충고하는 J선배 앞에서 차마 예바른 웃음을 짓진 못했다. 티없이 순수한 얼굴 속에서 난 티끌만큼의 악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조금은 서글픈 마음이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무언가에 쫓기듯 곧 횡설수설 변명을 시작했다. 공부할 때 일을 병행하는 건 긍정적인 자극이 된다고. 오히려 논문이 안풀릴 때면 일하는 시간이 리프레쉬가 된다고. 장황한 연설이 끝났음에도 J선배의 얼굴은 더한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J선배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공허한 마음을 붙잡고 어쩔 줄을 몰랐다. 왜 당당히 말하지 못했을까. 부모님은 내 등록금을 내준 적이 없다고. 내 능력으로 모든 걸 해결했다고. 앞으로도 그럴거라고. 



  P는 아직도 바선생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난 마치 준비라도 했던 것처럼 속사포처럼 응원의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애초에 출발선이 다른 건 우리가 정할 수 있는게 아니에요 쌤. 하지만 그렇게 불리했던 쌤이 지금 결국 그들과 같은 자리에 있다는 걸 생각해 봐요. 저들은 그 많은 무기를 갖고 있었는데도 고작 우리와 똑같은 자리에 있을 뿐이에요.” 꽤나 근사했는지 P는 한동안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찝찝한 응어리가 남았다. P와 나 사이에는 C사라는 간극이 존재했으므로. 그에게 베푸는 나의 시혜와도 같은 말이 얼마나 허술할지, 대학원 시절 그 선배와 내가 뭐가 다르다고 할 수 있을지. 후다닥 말을 마친 나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색하고 이상한 격려를 끝으로 우리는 겨우 쳇바퀴같은 하루와 작별할 수 있었다. 



유일한 친구, 바선생님


  집에 돌아가며 생각했다. P는 혹시 집에 있을 지도 모를 바선생 때문에 돌아가는 중에도 내내 불안해하진 않았을까. 그 불안은 얼마나 지치고 외로웠을까. P와 비슷한 사람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외로운 생의 싸움을 하고 있는 걸까. 지친 몸을 이끌고 끝내 집에 돌아와 스위치를 올렸을 때 바선생만이 생의 허전함을 가득 메우고 있을 그 불행을 과연, 감히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침대에 누워 다시 바선생을 생각한다. 그 오래된 존재의 존재 이유를 규명이라도 할 것처럼. 지난한 삶 속에서 힘겹게 생을 지속하고 있는 이 세상 모든 이들의 무용한 고단함은 무엇으로 보답받을 수 있을까. 

  한참의 시간이 흐른다. 결국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은 고민에 늘 같은, 시시한 결론을 내려본다. 바선생이 식용이 되어버린 세상에서는 제발 생을 지속하고 있지 않기를, 사후세계가 아닐까 늘 의심하게 되는 이 생 속에서 더 험한 꼴은 보지 않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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