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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Sep 11. 2023

한강을 건너는 사람들

문득 우울한 날에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이유 없이 마음이 축축한 날. 물 먹은 솜처럼 더없이 가라앉아 수면 위로 얼굴만을 간신히 내밀고 있는 것만 같은 그런 날. 그렇게 이유 없이 힘든 날이면 어김없이 집밖을 나섰다. 오랜 습관만이 날 지켜줄 것을 알기에.


정처 없이 걷는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발에 맞추어 박동하는 맥박이 천천히 마음을 다독여 준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이곳, 한강이다. 언제나 도도하게 흐르고 있는 물살. 그 검은 물결에 정박할 데 없는 생각을 하나 둘 흘러 보낸다. 

지나간 것, 지나가고 있는 것, 지나갈 것. 무엇이든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 않다. 그 홀가분함은 가끔 숨통을 트여 줄지라도, 때로는 더없이 허전한 무상감이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결국 찰나의 인생은 흘러가는 것을 붙잡아 보고자 발버둥 치는 일에 불과한 걸까. 



 ‘한강대교’. 검은 물살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서 있는데 갑자기 그곳에 있었는지도 몰랐던 오래된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 콘크리트 교량은 얼마나 오래되었을까. 문득 궁금했다. 그렇게 찾아본 한강대교의 사연 속에는 익숙하고도 낯선 사실들이 가득했다. 

1917년 한강대교는 한강의 수많은 다리 중 두 번째로 세워졌다. 한강대교가 들어서기 훨씬 이전에도 이곳은 줄곧 서울과 외곽을 이어주는 나루터였다. 200년도 더 거슬러 올라가 1795년에는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조선의 왕 정조도 친히 이곳을 건넜다고 전해진다.



1795년, 강을 건널 채비를 마친 왕은 말했다. “집집마다 잘 살고 누구나 행복한 나라가 되도록 할 것이다” 그 해는 어머니가 환갑을 맞은 경사스런 해이기도 했다. 환갑연을 열기 위해 수원 화성으로 떠나는 왕의 성대한 행렬은 전에 없던 것이었다. 그 행렬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왕을 호위하는 장대한 대오가 나룻배 36척을 길게 이어붙인 다리를 건넜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날은 정조에게 더없이 특별한 날이었다. 어린 날 뒤주에 갇혀 서서히 죽어간 아버지를 목도한 후로 단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던 고단한 생이었다. 왕위에 오른 지 20년이 되는 해, 억겁과도 같던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는 온 세상에 자신의 꿈을 천명했다. 야심차게 건설한 새로운 도성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그의 마음은 한없이 들떴을 테다. 

다리를 건너는 그는 몰랐을 것이다. 자신이 불과 5년 만에 이 세상에서 사라지리란 사실을. 1800년, 19세기가 시작되던 날 그는 거짓말처럼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렇게 그의 꿈은 미완에 그치고 말았다. 그 뒤 100년도 안되어 그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그의 나라는 이웃나라의 군홧발에 처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그 뒤로 100여 년의 시간이 지난 후 이곳에서는 차마 믿기 어려운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루아침에 가족과 친지간에 총부리를 겨누어야 했던 전쟁이 터졌던 해였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한강대교는 굉음과 함께 폭파되었다. 그 때 그 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강을 건너고 있었다. 갑작스레 벌어진 전쟁을 피하기 위해 이른 새벽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전쟁이 터진 건 그보다 3일 전인 25일이었지만, 뒤늦은 새벽에 부랴부랴 짐을 꾸리고 나서게 된 건 연일 울려 퍼지던 서울이 무사할 것이라는 대통령의 라디오 방송 때문이었다. 살기 위해 떠난 길이 죽음을 재촉하게 될 줄은 차마 그들은 상상치도 못했을 것이다. 

폭파를 명령한 참모는 그날 새벽 북한군이 내려올 것을 대비한 조처였다고 했다. 하지만 그날 북한군이 서울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갑작스러운 명령에 북한군을 방어할 군인들조차 한강을 건너지 못했던 때였다. 일시에 다리가 폭파되었기에 군인들은 서둘러 수많은 무기와 장비를 버리고 맨몸으로 강을 건넜다. 그 날 생을 향한 갈급한 몸부림과 죽음을 위해 설계된 수많은 사물들이 함께 강바닥에 묻혔다. 

수년이 지난 후에도 한강대교의 비극은 잊혀지기에 바빴다. 한반도를 가르는 38선이 넘을 수 없는 국경이 된 오늘날, 그들의 죽음은 국가의 불명예라는 미명 하에 서둘러 은폐되었다. 


한 나라를 호령한 왕의 영혼도, 이름조차 모르는 수많은 얼굴 없는 이들의 영혼도 결국 그 모든 세월을 잊은 채 도도한 강물 속에서 하염없이 흐르고 있다. 검은 유속 안에 수많은 넋을 품고 있는 강은 고요하다. 그렇게 태연하기만 하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체념과 회한이 다시 고개를 들어 보였다. 다리 사이사이에 놓인 수많은 조명을 좇아 달려드는 하루살이의 미련한 투쟁을 바라보며, 내 생도 한없는 강물의 시간에서 바라보면 결국 저와 같지 않을까, 생각했다. 


돌아가야지, 한없이 피로해진 마음을 안고 다시 강을 건너보기로 한다. 강바람을 쐬러 나온 사람들이 저마다의 시간을 흘러 보내고 있었다. 문득 세상 속에 저만의 족적을 남겨 보겠다는 애쓰는 모두의 마음들이 한없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다시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조용히 모두의 안녕을 바라보았다. 온통 행복만은 없을지라도 그래도 많이많이 행복하기를. 흘러가는 것들은 어찌할 수 없이 그저 그렇게 모두 흘러가 버리겠지만, 순간을 붙잡는 마음들이 고통과 미움이 아닌 사랑으로만 가득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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