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가 아닌 야망을 택한 왕자
오대산 선재길,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있는 전나무 숲으로 유명한 곳이지요. 아름다운 이 길은 드라마 도깨비의 촬영지가 되어 한참 이목을 끌기도 했습니다. 이 나무, 저 나무를 헤치며 조금씩 오르다 보면 오대산 사고 터를 먼저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기록의 나라 조선은 역대 왕의 치세를 시간 순으로 정리하여 역사책을 펴냈는데요. 바로 그 유명한 조선왕조실록입니다. 조선 정부는 행여 예상치 못한 화재로 귀한 기록이 사라질까 두려워 전국에 4개의 사고를 지어 실록을 나눠 보관했지요. 오대산 사고가 그중 하나입니다. 그야말로 첩첩산중입니다. 풀 내음, 나무 내음에 취해 다시 길을 오르다 보면 작고 소박한 절, 상원사에 도착하게 됩니다.
치악산 남대봉 아래에 위치한 상원사는 신라 시대 때 지어진 먼 옛날의 절입니다. 수양대군, 세조가 사랑했던 절로도 유명하지요. 말년에 심한 피부병으로 고생한 세조는 상원사로 행차하여 요양하곤 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세조가 목욕할 때마다 옷을 걸어 두었었다는 관대 걸이도 오늘날 전하고 있습니다.
상원사에는 세조와 관련된 2가지 이야기가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상원사를 방문한 세조를 죽이고자 불단 밑에 자객이 숨어 있었는데, 갑자기 고양이가 나타나 세조의 옷깃을 끌어당겨 세조를 구하였다는 일화입니다. 고양이를 기특하게 여긴 세조는 강릉 지방에 '묘전(고양이의 땅)'이라는 이름의 땅을 내려 주었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상원사 앞의 계곡물에서 목욕하던 세조가 문수동자를 만나 피부병이 깨끗이 나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문수동자는 불교에서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입니다. 보살은 극락에 가는 걸 포기하고 이 세상에 남아 가엾은 중생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이지요.
그런데 왜 상원사에는 이처럼 세조와 관련된 영험한 이야기가 둘이나 전하게 된 걸까요? 아무리 병을 고치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첩첩산중의 절 말고도 다른 좋은 곳도 많을 텐데요. 그리고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은 나라가 아니었던가요?
사실 세조는 '호불' 군주였습니다. 수양대군 시절에는 "불교가 공자의 도보다 뛰어나다"라 표명할 정도였지요. 또 어머니 소원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어머니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부처의 일대기를 정리하여 책을 펴내기도 하였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직후에 간행된 석보상절이 바로 그 책입니다. 물론 아버지 세종의 명령에서 지은 책이었지만, 부처를 따르는 세조의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진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불교를 향한 세조의 사랑은 식을 줄을 몰랐습니다. 불경을 수집하고 번역하는 일을 도맡는 관청,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능엄경, 법화경, 금강경, 원각경 등 수많은 불경을 한글로 간행하였지요. 또한 틈틈이 신하들에게 불경의 중요성을 설파하곤 했습니다. 한 번은 신하들에게 능엄경을 강하게 하였는데, 불경을 잘 모르는 신하가 글을 읽고 해석하는 게 더디자 몽둥이 30대의 벌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조의 처사는 신하들 입장에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새 나라 조선을 세운 후로 전 왕조 고려가 숭앙한 불교를 배척해 왔는데, 그 모든 일을 수포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건 새 나라의 존재 이유를 뿌리째 흔들어 버리는 것과도 같았으니까요. 세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큰 공을 세운 신하, 신숙주도 세조가 불교를 숭앙하는 일만큼은 발 벋고 나서 비판하곤 하였습니다.
세조도 이러한 문제점을 모르는 게 아니었습니다. 세조는 "나는 불씨를 믿지만, 후대의 왕들은 나를 본받지 말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사실 세조가 불교에 깊이 빠지게 된 데에는 숨은 사연이 있었습니다. 세조는 자신의 젊은 날을 회상하며 깊이 후회하곤 했습니다.
"내가 차례도 아니면서 외람되게 큰 터전을 물려받았는데, 재주도 없고 덕도 없이 옛 정사를 변경한 것이 오히려 많았다."
"내 젊을 때에는 기운이 웅대하고 마음이 장하여 스스로 활쏘기를 평생의 업으로 삼았더니 이제 와서는 그렇지 않으니 만일 한갓 풍부(馮婦)처럼 힘만 조절할 줄을 모른다면 이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이 아니니라."
풍부는 젊은 날 호랑이를 잡는 유명한 무사였습니다. 노년에 옛 일을 후회하며 다신 호랑이를 잡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지만 어느 날 여러 사람이 호랑이를 좇는 모습을 보고 바로 가담하려 했지요. 맹자에 등장하는 옛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이야기의 숨은 속 뜻을 곰곰이 곱씹어 보면, 세조의 말에 뭔가 의미심장한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세조는 왕위에 오를 수 없는, 아니 올라서는 아니 될 운명이었습니다.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수양대군 세조 하면, 떠오르는 대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수양대군은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어떤 성향의 인물이었는지는 여러 기록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중 영화 관상에서 배우 이정재가 연기한 수양대군과 딱 부합하는 이미지는 단연 유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남아 있는 기록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조는 체구가 크고 활쏘기와 말 달리기가 남보다 뛰어났다. 나이 16세에 세종을 따라 왕방산에서 사냥을 하는 데 하루아침에 사슴과 노루 수십 마리를 쏘아서 피 묻은 털이 바람에 날아와 겉옷이 다 붉게 물들었다. 늙은 무사 이영기 등이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태조(이성계) 대왕의 신무(신과 같은 무예, 무용)를 오늘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였다.
일찍이 세종은 수양대군의 남다른 기량을 알아보았습니다. 세종은 세조에게 형 세자를 잘 보필하라는 당부와 함께 "형제를 대할 때는 사랑하고 반드시 법도를 엄히 하여 가르쳐야 한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세종은 향후 펼쳐질 핏빛 미래를 예견이라도 했던 것일까요.
형 문종은 왕위에 오른 뒤 채 3년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뒤를 이은 건 10대를 갓 넘긴 어린 단종이었습니다. 어린 국왕이 즉위하자 장성한 숙부 두 명이 정국을 둘로 나누어 치열한 경쟁을 벌입니다. 바로 수양대군과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입니다. 한편, 김종서, 황보인 등 신하들의 입김도 커집니다. 어린 왕이 정사를 잘 돌보지 못하자 당시 국정을 총괄했던 의정부의 신하들이 크고 작은 나랏일을 처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상황을 빠르게 치고 나가 정리한 건 잘 알고 계시다시피 수양대군입니다.
수양대군은 여러 무인을 대동하고 김종서의 집을 찾아가 그와 그의 아들 승규를 살해합니다. 궁궐을 찾아온 수양대군에 단종은 "숙부는 나를 살려 주시오." 애원하죠. 어린 조카 앞에서 수양대군은 자신을 반대하는 신하들을 하나 둘, 쇠몽둥이를 휘둘러 숙청하였지요. 하루아침에 세조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이후 단종은 수양대군이 모든 난을 평정하였다는 내용의 교서를 내립니다. 이 사건이 바로 '계유정난'입니다. 계유년에 난을 평정했다는 뜻이지요. 얼마 뒤 힘없는 어린 왕은 결국 숙부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는 상왕으로 물러나 있다가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귀양을 떠나는 단종의 곁에는 그의 왕비도, 그를 모실 상궁과 나인 한 명도 모두 따라가지 못했다고 전합니다. 낡은 가마를 탄 채 50여 명의 군사들의 철통 같은 감시 속에서 홀로 먼 길을 떠납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강원도 영월 청령포였습니다. 청령포는 절벽을 등지고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마치 섬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후 단종은 외롭고 쓸쓸한 이곳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단종을 다시 왕위에 올리려 했던 또 다른 숙부, 금성대군의 역모가 발각된 뒤, 세조가 단종에게 내린 사약이 당도하기 전의 일이었죠.
원하던 왕좌를 손에 거머쥔 세조는 과연 만족스러운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이쯤에서 서두의 이야기를 다시 끌고 와야 할 것 같습니다. 세조가 불교를 높이 숭앙한 이면에는 사실 정치적 목적이 있었습니다. '정상적으로' 왕위를 물려받은 것이 아니었으니 세조는 늘 '정통성'문제에 시달렸습니다. 세조는 불교와 부처의 힘을 빌어 자신이 왕위를 이은 사실이 정당하다는 뜻을 만천하에 전하고 싶어 했죠. 이는 세조가 일본 국왕에게 보내는 국서의 내용에서도 확인됩니다. 세조는 자신이 여러 지방을 돌아보며 살피는 과정에서 불교와 관련된 여러 상서로운 일들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밝혔습니다. 즉 자신의 존재를 불법을 실천하는 이상적인 불교 군주로 자리매김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한편, 세조는 왕위에 있는 동안 몇 차례의 역모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말년에 벌어진 '이시애의 난'은 세조의 마음을 지칠 대로 지치게 만든 사건이었죠. 이시애의 난에는 세조와 동고동락한 신하들도 연루되었습니다. 세종을 왕위에 올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충신 중의 충신, 신숙주와 한명회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역모에 가담하였다는 것은 끝내 사실 무근으로 밝혀졌지만, 세조는 예민하게 반응했습니다. 신숙주를 감옥에 가두었을 때 그의 지위를 감안하여 조금이나마 편히 대우해 주려 하였던 관리를 사형에 처해 엄히 다스렸던 것이지요. 사실 세조의 반응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시애의 난이 있기 얼마 전, 계유정난의 2등, 3등 공신으로 책봉된 이들이 실제로 역모를 모의한 사건이 벌어졌었거든요.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미루어 보았을 때 세조는 그가 쟁취한 왕좌에서 결코 편히 지내지만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세조의 계유정난, 어떻게 보셨나요? 혹시 묘한 기시감을 느끼시진 않았나요? 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지만 많은 이들의 피를 보고 왕좌에 오른 인물, 전편의 태종 이방원이 생각나진 않으셨나요? 이처럼 조선이 세워진 직후에는 세종 대의 찬란한 치적도 있었지만, 두 차례의 피로 물든 왕위 쟁탈전도 있었습니다. 새 왕조가 굳건히 뿌리내리기 위한 과정에서 일어난 어찌할 수 없는 성장통과 같은 것이었을까요?
지금까지 상원사 이야기를 시작으로 짧게나마 세조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리더십으로 여러 사람들을 모아 자신이 원하는 왕좌를 쟁취해 낸 세조(E),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자신의 운명이 아니었던 자리를 꿈꾸고, 또 꿈꿔 결국 이뤄 낸 세조(N), 원하는 바를 쟁취하기 위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냉혹하고, 나아가 잔인하였다고까지 할 수 있는 세조(T), 철저한 계획을 바탕으로 왕위에 오르고, 그 뒤에는 여러 불교 사업을 벌여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다져 간 세조(J).
이러한 사실들을 미루어 보아 수양대군, 세조의 MBTI는 엔티제(ENTJ)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어디까지나 재미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