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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Nov 04. 2023

1. 조선의 ESFP(태조 이성계)

500년 왕조의 시작을 연 신궁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호적한 숲길을 따라가다 보면 보기 드문 릉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500여 년간 명맥을 이어간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의 릉, 건원릉입니다. 봉분 위에는 수많은 억새풀이 솟아 있어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늘 고향을 그리던 아버지를 위해 그의 다섯째 아들인 태종이 손수 함경도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와 봉분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보관하였던 전라도 전주 소재의 경기전
경기전 안의 태조 어진, 원본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이 지점에서 눈치채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성계의 고향이 함경도라니요. 이성계는 전주 이 씨가 아니던가요. 이성계 집안이 전라도 전주에서 함경도로 이주하게 된 경위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성계의 4대조 이안사가 전주 관청과 사이가 틀어지는 바람에 강원도 삼척으로 이주했고, 고려말 몽골의 침입 때문에 다시 함경도로 거처를 옮겼다는 이야기만 어렴풋이 전해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성계가 나고 자란 함경도는 전쟁이 난무하는 험악한 변경 지역이었습니다. 지금도 함경도는 북한과 중국이 국경을 아슬아슬하게 맞대고 있는 지역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각박한 환경이 아이러니하게도 이성계에게는 크나큰 기회가 되었습니다.

난세는 영웅을 알아보는 법이지요. 청년 이성계는 숱한 전투 속에서 이름을 드날렸습니다. 이때 고려는 북쪽으로는 중국 변방 민족의 침략에, 남쪽으로는 일본의 해적 집단인 왜구의 침략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려 정부는 국방을 엄히 다스릴 힘이 없었습니다. '송곳을 꽂을 땅조차 없다', 당시 고려 백성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말이었어요. 나라의 운영을 책임져야 하는 관리들은 가난으로 울부짖는 백성을 수탈하며 날로 부를 쌓아가는 일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국가의 행정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니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는 것도 해당 지방의 몫이었던 것입니다.

함흥 본궁의 이성계 유품, 필름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렇게 혼란하던 시절, 말을 타고 자유자재로 적진을 누비며 국경을 철통같이 지켜내는 이성계는 백성들에게 영웅, 그 자체였습니다. 신장이 190cm에 달했다는 이성계는 매 전투마다 귀신같은 활솜씨로 승리를 거머쥐었습니다. 그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어느 날은 왜구의 피해가 너무도 극심하자 고려 정부가 직접 그를 찾아 나섰습니다. 적장 아지발도의 투구 끈을 활로 쏘아 내륙 깊숙이 침입한 왜구를 무찔렀다는 전설 같은 일화를 남긴 황산 전투가 바로 이때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명성은 반드시 뒤탈이 따르지요. 이성계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자 그를 바라보는 고려 정부의 시선도 곱지만은 못했습니다. 결국 고려 정부는 이성계의 나라에 대한 충심을 시험해 보기로 합니다. 함경도 이북에 있는 중국의 영토, 요동 지역을 정벌하는 일에 이성계를 앞세운 것이지요. 수많은 전투를 경험한 이성계는 이 싸움이 얼마나 가망이 없는 일인지 대번에 알아차립니다.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고려의 장수 최영과 논쟁까지 벌여가며 반대의 뜻을 분명히 전하지만 결국 뚜렷한 명분을 찾지 못한 채 전장에 나설 수밖에 없었지요.

이때 이성계는 자신의 운명을 뒤바꿀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립니다. 위화도 회군. 전쟁을 포기하고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되돌아온 것입니다. 늘 외적을 겨누었던 이성계의 칼날은 이제 고려 정부를 향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날마다 이성계를 찾아와 기울어 가는 나라의 운명을 논했던 수많은 이들의 설득이 있었습니다. 훗날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정도전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지요.

그 후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됩니다. 가장 시급했던 건 앞서 이야기했듯 땅 문제였습니다. 부당하게 토지를 소유한 자들을 찾아내어 벌을 주었습니다. 가장 먼저 토지 제도부터 바로 세운 것이지요. 이렇게 경제적 기틀을 마련한 이성계는 얼마 가지 않아 고려 궁궐의 앞뜰에서 여러 사람들의 성원에 힘입어 새로운 나라의 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된 후 이성계의 삶은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앞서 건원릉의 터를 닦은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 태종을 기억하시나요? 태종은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일에 어떻게 보면 아버지 이성계보다도 더 적극적이었습니다. 아들 중 유일하게 과거에 합격할 정도로 명민했던지라 이성계도 그런 태종을 자랑스러워했었지요. 그렇게 좋았던 부자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한 건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태종에게 죽임을 당한 이후부터였습니다. 정몽주, 고려의 마지막 충신으로 유명한 인물이지요. 이성계는 정몽주가 자신과 뜻이 달랐다고는 하나, 그를 마음속 깊이 존경하였다고 전해집니다. 태종은 그런 아버지의 우유부단함이 혹여 일을 그르칠까 날마다 조바심을 냈지요. 결국 아버지의 허락 없이 그를 처단하기로 결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이성계의 눈밖에 난 태종은 나라를 세운 공을 제대로 인정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나아가 이성계는 태종을 제치고 막내 방석을 자신의 왕위를 이어갈 세자로 점찍었지요. 분노에 휩싸인 태종은 결국 다시 칼을 잡습니다. 아버지의 권위를 넘어 새 나라에서 제 자리를 직접 찾을 셈이었지요. 그렇게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이 벌어집니다. 이성계는 자신의 왕위를 두고 아들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피의 각축전을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참한 심정일 수밖에요. 이성계는 둘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는 고향으로 잠적해 버렸습니다. 이후 자신이 원하던 대로 형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태종이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고자 무진 애를 썼지만 소용없었습니다. 함흥차사, 태종의 명으로 이성계가 있는 함흥에 간 신하들이 돌아오지 않아 만들어진 말입니다.

난세의 영웅으로 등장해 500여 년의 역사를 쓴 나라를 세운 그였지만 이렇듯 말년은 그 누구보다 쓸쓸하고 비참했습니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일생은 오늘날에도 여러 콘텐츠에서 꾸준히 회자되고 있지요.




지금까지 건원릉 이야기를 시작으로 짧게나마 태조 이성계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변방의 시골 장수였지만 늘 주변의 사람을 끌어 모으는 힘이 남달랐고 많은 이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이성계(E), 스스로의 명성을 고려의 충신이라는 타이틀 아래 유지하고자 하였으나 변해가는 시대를 읽어내며 현실적인 판단을 내린 이성계(S), 냉철한 판단력을 앞세울 줄 알면서도 자신과 의견을 달리했던 주변 사람을 쉽게 내치지 못하는 성정이었던 이성계(F),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고는 하나 아들들 사이에 벌어질 피의 서사시는 미처 예고하지 못한 이성계(P).

이러한 사실들을 미루어 보아 태조 이성계, 그의 엠비티아이는 엣프피(ESFP)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어디까지나 재미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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