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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Nov 05. 2023

2. 조선의 INTJ(세종대왕)

글 공부에 소질이 남달랐던 왕자

광화문 거리를 걸어본 적 있으신가요? 당당하게 곧추서서  광화문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순신 동상을 넘어 한 뼘만 내딛으면 바로 그를 만나실 수 있지요. 한 손으로는 책을 펴 들고 다른 한 손은 모두를 환영한다는 듯이 앞으로 쭉 뻗은 채 늠름하게 앉아 있습니다. 온화하고 인자한 그의 얼굴은 아마 많은 이들이 상상해 온 모습에 부합하지 않을까 싶어요. '세종대왕', 반듯한 필치의 한글로 크고 크게 써 있습니다. 그 밑에는 그가 살았던 시절 백성의 일상을 훤히 밝혀 주었을 해시계가 놓여 있지요.


조금만 더 걸어가 보기로 합시다. 최근 광화문 월대가 복원되었습니다. 세종대왕은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처럼 이곳에서 만천하 만백성에게 훈민정음의 존재를 알렸을까요? 어디에서였든 적지 않은 세월을 바쳐 만들어 온 새 글자를 처음 세상에 내보이는 순간,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벅차고, 또 벅차지 않았을까요?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을 지나, 중간문 흥례문을 또 지납니다. 그러면 2층 건물이 매력적인 근정전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 시절엔 이 건물이 오늘날 잠실 롯데타워에 버금가는 고층 건물이었을 테죠. 하지만 목적지는 이곳이 아닙니다. 좌측으로 좀 더 걸어가 봅시다. 아마 경복궁에 몇 번 와 보신 분들은 '경회루에 가는 길이구나.'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번 여행의 주인공은 경회루가 아닌 수정전입니다. 경회루 앞을 턱 가로막고 있는 작고 쓸쓸한 건물이지요. 세심하게 보지 않는다면 아마 그 존재조차 눈치채기 어려우실 겁니다.


수정전, 고종 4년(1867)에 복원되었다. 출처: 문화재청

"신하들 가운데서 재주가 있고 행실이 바르고 나이가 젊은 사람들을 따로 뽑아 이곳에서 학문을 연구하게 할 것이다." 조선의 공부벌레 중에서도 '원 오브 더 베스트'라고 할 수 있는 세종대왕, 그가 직접 한 말입니다. 눈치채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수정전이 있는 이 자리에는 본래 세종이 야심 차게 만들었던 학술 기관, '집현전'이 있었습니다. '어질고 현명한 이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집현전은 세종, 하면 따라붙는 익숙한 수식입니다. 신하들의 입장에서 세종은 꽤나 혹독한 상사였을 겁니다. 낮이고, 밤이고 학문과 정치밖에 모르는 워커홀릭이었던 그를 따라가기가 여간 쉽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런 탓에 일각에서는 훈민정음 창제는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을 말 그대로 들들 볶아 탄생한 것 아니냐,는 농도 난무합니다. 정말 그랬을까요? 지금까지 전해지고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훈민정음은 세종이 홀로 철저히 비밀리에 추진한 사업인 게 분명해 보입니다(물론 세종의 아들들을 포함해 집현전의 나이 어린 학자들 등 비밀스러운 조력자도 몇몇 있었을 테지만요). 하지만 그가 나라를 다스렸던 31년 7개월간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정책 성과와 기발한 아이디어의 발명품들, 조선의 기틀을 세운 책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 것을 보면 신하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볼멘소리도 그렇게 신빙성이 없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눈부신 업적을 이룬 세종'대왕'은 사실 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세종은 전편에서 등장한 문제적 인물, 태종 이방원의 세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적장자 계승 원칙을 따르는 조선에서 세종은 두 번째도 아니고 세 번째 아들이었으니, 왕위에 오를 가망성이 아주 희박했다고 할 수 있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태종은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많은 이들의 피로 물든 왕좌를 쟁취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왕위를 이을 첫째 아들, 세자에게 거는 기대는 얼마나 컸을까요? 자신의 업보와 과오를 덮고 새 나라의 기틀을 확실히 세워 나갈 수 있는 의젓하고 떳떳한 세자가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랐을 겁니다. 하지만 세자는 자꾸만 비뚤어져만 갔습니다. 글공부보다는 무예와 놀음에 훨씬 관심이 많았죠. 아마 이성계의 아들들 중 유일하게 과거에 떡하니 붙은 아버지 태종보다 귀신같은 활솜씨로 왜구를 무찌른 할아버지 태조를 닮은 탓이었을까요?

대안이 없다면야, 태종도 포기했겠지만 자꾸만 옆에 있는 셋째 아들, 충녕 대군에게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나날이 총기를 더해가는 충녕대군의 모습에 태종은 흡족해하면서도 꽤나 복잡한 심정이었던 듯합니다. 어려운 경전의 뜻을 척척 풀어가는 그에게 태종은 감탄하면서도 "너는 할 일이 없으니 평안하게 즐기거라."며 차갑게 선을 그었습니다. 적장자가 아닌 다른 아들에게 왕위를 넘겼다가는 본인이 지나온 길을 되풀이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한 게 아닐까 합니다.


세자도 충녕 대군의 뛰어남을 인정하면서도 늘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실록에는 늘 바른 소리로 세자의 비행을 꾸짖는 충녕 대군과 그런 동생에게 노여움을 품는 세자의 모습이 종종 등장합니다. 어느 날은 외할머니의 제사를 마친 뒤 세자가 지인과 함께 바둑을 두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를 본 충녕은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한마디를 던집니다. "한 나라의 세자가 간사한 소인배와 놀음을 하는 것도 불가한데, 더군다나 오늘은 제사가 있는 날"이라는 것이죠. 세자는 충녕에게 "너는 가서 잠이나 자라."며 퉁명스레 대응합니다.

나날이 세자의 비행이 심해지자 태종도 서서히 마음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태종은 충녕 대군의 학문을 칭찬하며 함께 있는 세자에게 "너의 학문은 어째서 이만하지 못하냐?" 쏘아붙이곤 했지요. 그러다 결국 태종이 세자에게 영영 마음이 떠나가버린 결정적 사건이 터집니다. 세자가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신하의 첩과 연을 통해 아이까지 가지게 하였던 것입니다. 태종은 세자가 뉘우친다면 용서해 줄 뜻도 내비쳤지만, 세자는 "다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얻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당히 불경한 내용의 반성문을 올렸습니다. 결국 태종은 세자에 대한 모든 기대를 내려놓고 충녕을 새로운 세자로 임명합니다.  

그렇게 세자는 '양녕 대군'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 기억되고 있습니다. 한날한시에 폐세자 신분이 되어버린 양녕 대군의 심정도 말이 아니었겠지만, 태종은 폐세자를 결정한 날 "통곡해 흐느끼다가 목이 메었다."라고 합니다. 과거 자신이 아버지 태조에게 저지른 불효를 떠올렸던 것일까요.


그러나 그날 태종이 내린 결단은 오늘날 태종의 가장 큰 업적으로 회자되곤 합니다. 그의 어려운 결정이 오늘날까지 칭송받는 성군 중의 성군, 세종 대왕을 낳은 것은 분명하니까요. 세종은 왕위에 오른 뒤에도 큰 형 양녕 대군을 극진히 모셨습니다. 1년에 한 번씩은 꼭 형을 만나 우애를 나누었고, 왕위 계승 서열 1위였던 양녕 대군이 원치 않는 구설수(예를 들면 역모를 꿈꾸고 있다는 등)에 오를 때면 변함없이 그를 지지하고 믿어 주었습니다. 형제의 아름다운 결말에 태종도 마음 놓고 눈을 감았을 겁니다.

드물게 남아 있는 양녕 대군의 필체, 국립전주박물관 소장


자, 돌고 돌아왔습니다. 세종의 업적은 앞서도 이야기했듯 차고 넘치지만 그중 훈민정음 창제가 단연 기념비적이라 할 수 있겠지요.  30여 년, 세종은 참 긴 세월 동안 왕좌에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건강이 늘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눈 건강이 나빴던 그는 세자에게 나라일을 맡기고 자주 온천에 행차해 요양하곤 했지요. 그런 와중에 덜컥 세종은 신하들에게 자신이 만든 새 문자의 존재를 알립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지요. 건강도 성치 않은 노쇠한 왕이 글자를 만들었다니요. 하지만 대부분의 신하들은 세종이 고생하고 고생하여 만든 새 문자를 두 팔 벌려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되려 백성에게 알리기를 반대하고 또 반대하였지요.

세종이 아꼈던 신하, 최만리도 단호한 반대의 뜻을 전했습니다. 최만리는 집현전에서 24년간 근무한 잔뼈 굵은 신하였습니다. 집현전의 시작부터 함께 한 신하였으니, 세종이 그를 얼마나 아꼈을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그의 주장은 이러했습니다.


"예부터 독자적으로 글자를 만든 사례는 오랑캐의 나라인 몽골, 서하, 여진, 일본 등 밖에 없습니다. 새 문자가 알려지면 모든 사람이 어려운 한문은 멀리하고 쉬운 새 문자만 배우려 할 것이니, 유학의 가치에서 멀어질 것입니다. 또 만약 명나라(중국)가 알게 된다면, 우리를 비난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보기엔 갸우뚱할 수밖에 없는 논리입니다. 새 문자를 만들어 알리는 일에 왜 중국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는 것일까요?

삼강행실도언해,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사실 이 반대 의견의 포인트는 '유학의 가치에서 멀어진다'에 있습니다. 한문을 배워보신 적이 있나요? 한자는 영어나 한글과 달리 글자 자체가 소리가 아닌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한자가 주욱 적혀있는 문장을 막힘없이 읽으려면 여러 문장의 사례를 많이 보고 익혀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문장을 만나더라도 한자 하나하나의 뜻을 요리조리 적절하게 조합하여 온전한 뜻으로 해석해 낼 수 있죠.

조선은 유학을 근본으로 삼은 나라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살고 있듯 조선은 유학을 모든 사람이 지향해야 할 기본 중의 기본의 가치로 생각했던 것이지요. 유학에서 중요하게 말하는 임금에 대한 충성, 어버이에 대한 효도, 예의와 인덕 등의 가치를 진정하게 깨우치려면 오래 전 유학의 기틀을 닦은 공자, 맹자 등 성현들이 쓴 책을 마르고 닳도록 읽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야 경전 속 한문의 뜻을 올바르게 깨우쳐 제 일상과 삶에 유학의 가치를 올바르게 실현할 수 있다고 믿은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본의 흐름을 알기 위해 기업의 재무제표와 부동산 이슈, 세계 경제 이슈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지요.

하지만 세종은 카리스마 있는 한마디로 모든 논란을 일축합니다.


"네가 운서를 아느냐, 사성칠음에 자모가 몇이나 있느냐. 내가 운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 ... 내가 만일 삼강행실도를 새 문자로 번역하여 백성에게 알리면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 효자, 열녀가 무리로 나올 것이다."


참 대단한 자신감입니다. 학문에서는 자신을 따라올 자가 그 아무도 없다는 말이니까요. 세종은 한문을 배우는 데 훈민정음이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중국의 글자인 한자를 저마다 제각각 다르게 읽기 일쑤였거든요. 운서를 바로잡겠다는 건 한자의 발음을 훈민정음으로, 즉 우리 식대로 다시 정리해 보이겠다는 야심찬 선언이었습니다.


한편, 삼강행실도는 유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실천 윤리를 적절한 에피소드와 그림으로 풀어낸 책이었습니다. 세종은 삼강행실도를 다시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널리 알리리라는 포부를 갖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면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도 책을 읽고 너도나도 유학의 교훈을 얻을 수 있을테니까요. 훈민정음으로 번역된 삼강행실도언해는 세종 뒤에 다섯 번째로 즉위한 왕인 성종 때 완성되어 백성에게 전해집니다.

 

이처럼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라는 뜻의 훈민정음은 우여곡절 끝에 우리의 곁으로 왔습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무감각하게 쓰고 있는 이 글자 속에 이렇게 수많은 인물들의 사연이 숨어있는 것이지요.



만 원권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한 세종, 어떤 인상이 인티제에 가까운 것 같나요? (영양산촌생활박물관 소장)


지금까지 수정전 이야기를 시작으로 짧게나마 세종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일보다는 학문과 책을 누구보다 사랑하였던 세종(I), 당시 사람들이 기상천외하게 여길 정도였던 새 문자를 발명하는 일을 상상하고 또 실행에 옮긴 세종(N), 비행을 일삼는 큰 형에게나, 자신의 뜻을 가로막는 신하들에게나 그들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늘상 자신감 있는 팩폭을 남발한 세종(T), 긴 시간 동안 남몰래 훈민정음 창제라는 어마어마한 일을 철저한 계획 끝에 이루어낸 세종(J).


이러한 사실들을 미루어 보아 세종 대왕의 MBTI는 인티제(INTJ)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어디까지나 재미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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