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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Nov 26. 2023

4. 조선의 ESTJ(임꺽정)

3년이나 정부를 따돌린 도적

깎아지른 듯한 벼랑을 녹색의 한탄강이 에둘러 흐르고 있습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풍경에 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의 시름이 잠시 잊히는 듯합니다. 마치 동양 산수화 한 폭을 연상케 하는 강원도 철원의 고석정은 수많은 드라마, 특히 사극의 촬영지로 이름나 있습니다. 요즘 화제인 드라마 연인의 촬영지이기도 하지요. 알만 한 분들은 이미 그 절경에 취해 몇 번이고 재차 고석정을 방문한다고 합니다. 

고석정 인근의 순담 계곡(출처: 문화재청)

이처럼 오늘날 많은 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고석정, 이곳에는 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임꺽정, 그의 구체적인 인생 스토리는 모르더라도 그 이름 석자 정도는 들어 본 경험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사실 고석정은 임꺽정이 조선 정부의 숨 막히는 추격전을 피해 몸을 숨겼던 곳이었습니다. 그 덕에 고석정 곳곳에서는 임꺽정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패널이나 식스팩 근육질의 몸매를 자랑하는 그의 동상을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임꺽정,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조선 후기의 저명한 실학자 성호 이익은 임꺽정을 장길산, 홍길동과 함께 조선의 3대 도적으로 손꼽기도 했습니다. 임꺽정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군도'의 대표적인 사례로 자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했습니다. 관리들의 수탈이나 자연재해 등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던 백성은 떼를 이루어 방화, 약탈, 절도 등으로 생계를 꾸려가곤 했는데 이러한 무리를 '군도'라고 부릅니다. 하정우, 강동원 배우가 주연한 영화 군도를 떠올리시면 대번 이해가 되실 겁니다. 

영화 군도의 한 장면(출처: 네이버 영화)

임꺽정은 문자 그대로 세상을 '벌벌 떨게' 만들 정도로 위용이 대단했습니다. 조선 정부가 임꺽정이 이끄는 도적떼를 추적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기 시작한 건 1559년 3월 27일입니다. 그런데 드디어 그 무리를 소탕하였다는 기록은 1562년 1월 초에야 보입니다. 무려 3년이나 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것이죠.


"임꺽정이라는 조그마한 도적이 많은 죄를 짓고도 오래도록 법을 피하고 있는데, 국가에서는 치욕만 당하고 쉽게 잡지 못하니, 이는 오랫동안 무비(무예)를 닦지 않았기 때문이다. 뒷날 또 을묘년(1555년 왜구가 조선에 침입한 사건) 같은 변고가 있으면 어떻게 하려는지 모르겠으니, 한심스러운 일이다." 
- 명종실록 중 명종의 말

 

20대의 젊은 왕 명종은 임꺽정 무리를 상당히 우려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임꺽정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친히 여러 차례 내릴 정도였죠. 심지어 임꺽정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를 반드시 생포하여 압송하고, 한성(서울)으로 올라오거든 궐 안에서 심문하라고 특별히 지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때 잡힌 임꺽정은 '진짜' 임꺽정이 아니었습니다. 임꺽정을 잡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의 현상금은 높아져만 갔습니다. 그러자 임꺽정을 잡았다고 거짓으로 보고하여 인생 한방, 부귀영화를 노리는 사람들이 등장했던 것입니다. 이번에 잡힌 사람들도 욕망에 사로잡힌 의주 목사의 레이더망에 걸린 무고한 이들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임꺽정 무리라는 오명을 쓴 채 온갖 고문 끝에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임꺽정은 어떻게 모든 수사망을 스무스하게 빠져나갈 수 있었던 걸까요? 이쯤에서 쫓고 쫓기는 숨 막히는 추격전과 관련한 기록을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임꺽정은 양주(楊州)의 백정인데, 성품이 교활하면서도 사납고 용맹스러웠다. 무뢰배들을 불러 모아 도적질을 한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조정에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
경기와 황해도 일대의 아전과 백성이 임꺽정과 비밀리에 결탁하여 관에서 조치하여 잡으려고 하면 그 소식이 새어 나가고 말았다. 이 때문에 임꺽정의 무리가 거리낌 없이 날뛰었으나 관에서 금할 수가 없었다. 정부에서는 선전관을 보내 정탐하게 했는데, 도적들이 신을 거꾸로 신고 다녀 발자취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선전관이 구월산에 갔다가 그들의 발자국을 보고 이미 나간 줄 알고 바로 돌아오는데 도적이 뒤에 있다가 쏘아 죽였다. ......
정부에서 또 장연(長淵)ㆍ옹진(瓮津)ㆍ풍천(豐川) 등 고을의 무관과 수령(사또)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임꺽정을 잡게 하였는데, 아전과 백성들이 벌써 내통하여 밤에 60여 명이 말을 타고 높은데 올라가 추격군에 활을 비 오듯 쏘아대니, 추격하는 군사들이 흩어져 버렸다. 
- 대동야승


이처럼 임꺽정은 '신을 거꾸로 신는' 등 교묘한 술책을 써서 관군을 요리조리 빼돌렸습니다. 실제로 임꺽정은 꽤나 영리한 도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관아에 자신의 수족을 포졸로 위장시켜 근무를 서게 하는 등 대범하고 치밀한 계획을 구상했던 사실도 전해지고 있을 정도입니다. 


한편 임꺽정을 성심성의로 돕는 수많은 백성도 있었죠. 그렇다면 이렇게나 많은 이들이 왜 임꺽정에게 그토록 환호했던 걸까요? 이는 조선왕조실록의 '사평'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임꺽정을 묘사한 수많은 기록은 그의 잔학함과 교활함에 초점을 맞춘 것들이 꽤나 많습니다. 위정자의 입장에서 그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도 정곡을 콕 찌르는 듯한 내용도 많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합니다.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은 한쪽 귀퉁이에 자신의 코멘트를 남겨놓곤 했는데요. 이를 사관의 평가라는 뜻에서 '사평'이라고 합니다. 실록은 왕을 포함해서 당대를 살았던 그 누구도 함부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관은 자신의 찐 생각을 댓글처럼 붙여 두곤 했던 것입니다. 임꺽정과 관련한 사평을 하나 보시겠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국가가 선한 정치를 펴지 않고 신하들의 횡포와 사또들의 포학함이 백성의 살과 뼈를 깎고 피를 말리니, 백성은 손발을 둘 곳이 없고 호소할 곳도 없으며 굶주림에 절박하여 하루도 살기가 힘들다. 백성이 연명하고자 도적이 된 것인데 이는 정치를 잘못하였기 때문이요, 백성의 죄가 아니다. 
- 명종실록 명종 16년 10월 6일 사평


영화 군도의 한 장면(출처: 네이버 영화)

이처럼 사관은 마음 터놓고 호소할 수 없었던 스스로의 양심을 기록으로 전했습니다. 아니 그런데,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셨나요? 새 왕조의 영광은 어디로 갔나요? 고려 말 신하들의 횡포를 쇄신하고자 야심 차게 추진한 토지 개혁을 바탕으로 세워진 조선이 아니었던가요? 건국 이후 150여 년이 흘렀을 뿐인데, 이처럼 백성은 고려 말과 비슷한 생활고를 겪게 되었습니다. 다음 편에서 더 상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조선 최악의 폭군으로 기억되는 연산군 대를 거쳐 왕과 혼인 관계에 있던 신하, 외척들의 폭정이 난무하는 인종, 명종 대가 되면서 조선은 극심한 혼란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사관의 말대로 정치가 바로 서지 못했으니, 백성의 삶이 고달파진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죠. 


그런데 사실 임꺽정은 이러한 정치 체제를 뒤엎고자 일어선 '역적'은 아니었습니다. 당대 어려운 사회에 대해 이렇다 할 철학을 갖고 군도를 일으킨 건 아니었던 것이죠. 임꺽정이 관아를 털거나 탐관오리를 징벌하여 백성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는 있지만, 간혹 민가를 불사르거나 약탈한 뒤 사람들을 잔혹하게 살해하였다는 기록도 종종 보입니다. 


홍명희가 쓴 임꺽정 소설, 1948년 본,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그런데도 많은 분들이 임꺽정이 의협심으로 똘똘 뭉친 의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건 후대에 나온 임꺽정에 관한 소설이나 영화 덕분입니다.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지식인 홍명희가 쓴 소설이 신호탄이었습니다. 홍명희는 자그마치 12년 동안 조선일보에 임꺽정 이야기를 연재하였습니다. 홍명희는 임꺽정이 조선 시대 가장 천대받던 '백정' 계급이었던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백정 출신의 임꺽정이 사회에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 자체를 높게 평가했던 것이죠. 일제의 억압 속에서 하루하루 독립을 꿈꾸었던 홍명희의 간절한 마음이 임꺽정을 새로이 브랜딩하였던 것입니다.


고우영이 그린 임꺽정 만화, 1972년부터 일간 스포츠에 연재되었다.(출처: 한국만화박물관)

3년 간이나 조선 정부를 공포에 떨게 하였던 임꺽정,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끝은 있었습니다. 임꺽정은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부하 서림의 배신으로 붙잡혔습니다. 서림의 고변으로 궁지에 몰려 포졸로 위장한 채 도망하던 임꺽정은 관군의 수많은 화살에 맞고 결국 그 자리에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는 "서림아, 서림아, 네가 어떻게 투항할 수 있느냐..." 외쳤다고 전해지죠.  


지금까지 고석정 이야기를 시작으로 짧게나마 임꺽정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어려운 시절 많은 사람들을 한 데 똘똘 뭉치게 한 카리스마와 리더십을 겸비한 임꺽정(E), 체제를 뒤바꾸겠다는 철학보다는 당장에 어려운 현실만을 타파하고자 군도를 일으킨 임꺽정(S), 백성을 돕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차갑고 잔인한 면모도 갖고 있었던 임꺽정(T), 정부의 서슬 퍼런 감시와 추격에도 교묘한 계획으로 요리조리 피해 갔던 임꺽정(J).


이러한 사실들을 미루어 보아 임꺽정의 MBTI는 엣티제(ESTJ)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어디까지나 재미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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