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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Dec 14. 2023

5. 조선의 INTP(연산군)

끝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 왕

광화문 우측으로 길게 난 길을 쭉 따라 걷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궁궐로 통하는 문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바로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입니다. 경복궁이 조선 왕조가 세워짐과 동시에 건립된 조선의 위풍당당 대표 법궁이라면, 창덕궁은 조금 더 특별한 목적 아래 건립된 이궁이었습니다. 이궁이란 임금이 법궁에서 거처하다가 사정이 생겼을 때 임시로 거처하며 정치를 돌보고자 세운 궁궐을 말합니다.

창덕궁은 태종이 세웠습니다. 왕자의 난을 무려 두 차례나 거치고 왕좌에 앉은 태종은 꿈자리가 좋지 못했는지 잠시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환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양으로 다시 돌아오죠. 그런데도 계속 마음이 편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고민 끝에 태종은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려는 목적으로 지금의 창덕궁을 지었습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임금들도 법궁인 경복궁보다 창덕궁에 거처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창덕궁 안으로 난 길을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웅장한 건물 희정당에는 연산군의 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희정당의 본래 이름은 수문당(修文堂)이었습니다. '학문을 연마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혹은 '학문을 숭앙하는 곳'이라는 뜻에서 '숭문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희정당은 조선 후기 임금들이 신하들과 함께 정치를 논하는 편전의 역할을 하였는데요. 조선 전기 수문당이었던 시절에는 임금의 처소, 침전이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도 수문당에서 무려 26년간이나 거처하였다고 하죠. 연산군은 왕좌에 앉은 후로 2년이 되자 수문당의 이름을 희정당이라 바꾸어 버립니다. 단순하게 해석하면 '기쁘게 정치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하들은 연산군의 결정에 이곳은 정사를 돌보는 곳일 뿐 아니라, 학문을 닦는 곳이라며 반대했다죠.


희정당 현판(출처: 문화재청)


간단한 일화이지만 무언가 찜찜합니다. 연산군은 아버지의 치적이 서린 곳에 무슨 감정이라도 있었던 걸까요? 한편에는 이때 수문당이 불에 타는 바람에 다시 건물을 짓고 이름을 바꾼 것일 뿐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자료로는 정확한 사실을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연산군이 아버지에게 결코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만큼은 사료에서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연산군은 아버지가 세운 옛 법을 모두 폐지하는가 하면, 성종에게 제사 지내는 사람들을 처벌했습니다. 나아가 성종의 기일에 사냥에 나가거나 성종의 릉인 선릉에서 연회를 베풀기도 했죠.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성종의 반신 영정(초상화)을 걷어 손으로 때리거나 영정을 향해 활을 쏘고, 아버지의 후궁을 궁궐 안에서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연산군의 기이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이러한 패행들은 효를 강조하는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연산군이 아버지에게 이토록 악감정을 품은 연유는 무엇일까요? 연산군이 세자였을 시절 아버지 성종과의 일화 하나를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세자가 "거리에 나가 놀다 오겠습니다." 하므로 성종이 허락하였다. 저녁때 세자가 대궐로 돌아오자 성종이 "네가 오늘 거리에 나가 놀 때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니 세자는 "구경할 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 소를 따라가는데, 어미 소가 소리를 내면 송아지도 소리를 내며 응하였습니다. 어미와 새끼가 함께 살아 있으니 부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였다. 성종은 이 말을 듣고 슬피 여겼다.
- 연려실기술


연산군은 각종 드라마, 영화로 회자되어 온 인물이죠. 그중 하나라도 접해 보신 분들이라면 소개해 드린 일화가 뜻하는 바를 단번에 간파하셨을 것 같습니다. 연산군의 친어머니 윤씨는 연산군이 장성하기 전에 궁에서 쫓겨났습니다. 처음 중전이 되었을 때는 총명하였으나 점차 남편의 행보에 시기와 질투가 심해지더니 결국 성종의 얼굴을 할퀴는 죄를 저지르는 바람에 중전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성종은 세자의 친모였던 윤씨 문제를 내내 고심했지만 결국 연이어 사약까지 내리고야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연산군을 세자 자리에서 내치지는 않았죠. 자신의 적장자였던 세자의 지위를 굳건히 지켜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조선은 적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원칙을 따랐던 왕조였습니다. 그러나 실상 적장자가 아버지의 뒤를 이은 예는 놀랍게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총 27명의 왕 가운데 적장자였던 이는 고작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7명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왕위 계승에 수많은 변수가 존재했음을 방증해 줍니다.


1962년에 개봉한 영화 연산군 포스터(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적장자가 부왕의 뒤를 잇게 된다면 그 왕의 정치적 지위는 탄탄대로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 시절 세자로 책봉되어 왕이 되기 위한 교육과 훈련도 척척 받고 성장하였을 테니 순탄하게 왕위에 오르면 그 존재 자체가 떳떳한 정통성을 상징하는 권력이 될 테니까요.

하지만 성종 자신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혹시 전편에서 다룬 세조를 기억하시나요? 세조의 첫째 아들 의경 세자와 둘째 아들 예종은 20대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바람에 의경 세자의 둘째 아들이었던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죠. 첫째 아들 월산군을 제치고 자을산군이 왕위를 이은 건 장인 한명회의 입김 덕분이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공신 한명회, 그입니다. 이제는 왕위 계승 문제까지도 주무를 수 있을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된 것이죠.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자을산군이 바로 성종입니다. 성종은 장인 한명회를 포함한 세조 대 공신들의 막강한 권력을 견제하고, 세력 균형을 이루고자 치세 전반에 걸쳐 갖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폐비 윤씨의 아들 연산군이 무사히 왕위에 오른 데에는 바로 이러한 배경이 있었던 것이죠.

과연 성종의 결정이 옳았던 것일까요? 안타깝게도 연산군은 꽤나 유리한 환경을 타고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권력을 발판 삼아 비뚤어진 욕망을 표출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폭군이라는 수식이 결코 과하지 않을 만큼, 기이한 행보를 이어 갔죠. 많은 사람들이 그 이유를 어머니의 부재에서 연원한 연산군의 결핍에서 찾으려 합니다.

영화 왕의 남자의 한 장면(출처: 네이버 영화)


사실 연산군은 친모 윤씨의 존재를 몰랐습니다.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윤씨 다음에 중전이 된 정현왕후를 친모로 알고 자랐죠. 친모가 쫓겨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즉위 직후였습니다. 아버지의 묘지명을 읽다가 이상함을 알아챈 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에 관한 내용에 착오가 있다며 신하에게 알아보라고 지시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건 기록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이었죠. 큰 충격을 받은 탓인지 윤씨의 존재를 알게 된 그날, 연산군은 수라마저 물렸습니다.


영화 왕의 남자의 한 장면(출처: 네이버 영화)

그러나 흔히 알려진 것처럼 연산군은 친모가 쫓겨났다는 아픈 과거를 알자마자 폭군의 길을 자처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갓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아버지와는 다른 정치 행보를 걷고 싶어 했죠. 앞서 성종은 세조 대의 공신을 견제하고자 무진 애를 썼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성종은 새 나라 조선을 세우는 일에 반대하고 지방으로 내려 가 두문불출하던 사대부들의 자손과 제자들을 주목했습니다. 그러고는 곧 이들을 적극 등용하기 시작합니다. 교과서를 펼치면 쉽게 접할 수 있는 '사림'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입니다.

사극을 보다 보면,  "전하 아니되옵니다!" 바른말만 외치는 신하들을 흔히 보셨을 겁니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3사의 관원들인데요. 이들은 오늘날 언론이 수행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성종은 사림을 3사의 자리에 앉히고는 세조 대의 공신들, 즉 훈구의 비리를 파고들게 했죠. 왕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사림은 그렇게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급부상했습니다.

연산군은 세자 시절부터 사림을 탐탁지 않게 여기곤 했습니다. 떼로 모여 이 사람, 저 사람을 비판하고 나서는 3사의 행보에 "너희는 문서나 맡은 관리이다."라며 선을 확실하게 긋곤 했죠. 임금의 명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신념과 의견을 펴는 관원에게는 "주인이 이렇게 하여야 하겠다고 하는데, 종이 불가하다고 맞선다면 매우 불가한 일이다."라며 여과 없이 불편한 감정을 내비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498년에 이윽고 일이 터지고야 말았습니다. 사림의 거두로 추앙받는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불손한 이야기를 실록에 실은 것에서부터 사건은 시작되었죠. 이야기는 숙부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초의 왕 의제를 기리는 내용이었습니다. 훈구는 김일손이 세조를 이야기에 빗대어 비판한 것이라 주장했죠. 그렇게 사림이 대거 정계에서 쫓겨났습니다. 무오년에 사림이 화를 입었다고 하여 이 사건을 '무오사화'라고 합니다.


연산군 시대 세워진 금 표(출처: 문화재청)

하지만 무오사화는 연산군과 훈구의 동상이몽 속에 벌어진 해프닝에 불과했습니다. 자신을 방해할 신하들이 사라졌다고 여긴 연산군은 계속해서 왕권을 드높이려 했습니다. 사치와 향락은 왕이 누릴 수 있는 당연한 권한이라고 여겼죠. 궁궐의 담장을 높이거나 행랑을 보수하는 공사에 무리하게 백성을 동원한 것은 물론, 궁궐 주변 수많은 민가들을 강제로 철거하여 왕의 놀이터로 삼았습니다. 이곳저곳에 금표를 세워 왕의 영역을 정하고 함부로 들어오는 자를 엄벌했죠. 민가 철거가 얼마나 심했는가는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나기 직전의 실록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왕이 친히 성터를 살펴보는데 말을 타고 마을 거리를 횡행하느라 운종가 이북의 인가를 남김없이 몰아냈다. 그러자 처녀들은 맨발로 뛰어 달아나 돌아갈 길을 잃었고, 시종 하는 신하들은 모두 멀리 피하였다.
- 연산군일기


신하들은 연산군의 폭정에 제동을 걸고자 목숨을 내놓고 충언하였습니다. 아버지 성종의 선정을 자주 모범 사례로 들었죠. 성종과 자신을 끝도 없이 비교하는 신하들 앞에서 연산군은 자신은 성종과 같지 못하다며 자괴감 섞인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연산군의 아버지에 대한 열등감은 점점 반감으로 뒤바뀌어 갔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 성종을 겨냥한 각종 패행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결국 1504년, 다시 사화가 벌어집니다. 폐비 윤씨를 위한 연산군의 보복이라고 알려진 갑자사화입니다. 갑자사화 때는 을사사화 때보다 훨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신하들을 벌하려 속의 뼈를 꺼내고 부수어 바람에 흩날리기까지 했다죠.

그렇게 이제야 말로 연산군의 세상이 온 듯했습니다. 광기 어린 왕의 보복 앞에서 모든 신하들은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화 왕의 남자의 한 장면(출처: 네이버 영화)

갑자사화 뒤로 연산군의 독재는 극치에 달했습니다. 연일 이어지는 연회의 비용을 충당하고자 말 그대로 백성의 고혈을 쥐어짭니다. 한 해의 세금도 버거운 백성에게 연산군은 2년, 3년 치의 세금을 미리 거두어들이라 지시합니다. 나아가 이제는 경기도 지역의 민가까지도 철거하라는 명을 내리죠. 백성은 임금의 악행을 언문(한글)으로 써서 거리의 이곳저곳에 붙이며 소극적으로 저항했습니다. "우리 임금은 신하를 파리 죽이듯 하고 여색에 절도라고는 없다"라는 내용이었죠. 이에 연산군은 언문을 탄압하는 것으로 응수했습니다.


영화 왕의 남자의 한 장면(출처: 네이버 영화)

하지만 그런 연산군도 자신의 끝을 예견했던 모양입니다. 하루하루 혹여 폐위당할까 두려워 한 연산군은 자신을 지키는 군사의 수를 늘리는 한편, 낮밤을 막론하고 관원들과 상인들의 행적을 단속했습니다. 또 궁궐의 문을 지키는 수문장에게는 사흘마다 경호 상황을 서면으로 보고하게 했죠.

연산군이 예상한 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반정은 기어코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반정의 소식을 들은 연산군은 활과 화살을 가져오라 명했지만 그의 옆에는 이미 아무도 남지 않은 후였습니다. 붉은 옷에 허리띠도 두르지 못한 초라한 행색으로 연산군은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내가 큰 죄를 지었는데도 특별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새로 왕으로 즉위하는 중종에게 남긴 연산군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귀양 길에는 여러 백성이 앞다투어 나와 손가락질하며 통쾌히 여겼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연산군은 좁고 긴 울타리로 둘러싸여 해마저 볼 수 없었던 귀양지에 병을 얻어 곧 세상을 떠납니다.

적장자의 지위를 기반으로 왕위에 올라 탄탄대로일 것만 같았던 그의 치세는 이처럼 자신이 자초한 과오들로 인해 허무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연산군이 드리운 길고 긴 그림자로 인해 새 왕조 조선은 때 아닌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죠.



지금까지 희정당 이야기를 시작으로 짧게나마 연산군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독단적인 정치 행보를 걷기 위해 소통보다는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길을 택한 연산군(I), 현실에 대해서는 눈을 질끈 감고 끝없는 욕망과 쾌락을 좇으며 치세 대부분을 보낸 연산군(N), 자신을 거역하는 이들을 잔인하게 응징했을 뿐 아니라 백성의 고통에도 공감할 줄 몰랐던 연산군(T), 반정을 직감적으로 예견했음에도 최후를 치밀하게 대비하지 못했던 연산군(P).


이러한 사실들을 미루어 보아 연산군의 MBTI는 인팁(INTP)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어디까지나 재미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개인 사정으로 이번 편은 금요일에 발행하는 점 양해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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