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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Dec 26. 2023

6. 조선의 ENTP(황진이)

스스로의 운명을 사랑한 여인

폭포에 가 본 적이 있으신가요? 물이 바닥으로 시원하게 곤두박질하는 광경은 마음속 시름과 걱정까지도 씻겨 주는 것만 같습니다. 북한 개성 지역에는 금강산의 구룡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로 일컬어지는 박연폭포가 있습니다. 얼마나 경관이 빼어난지 몸소 확인해 보고 싶지만 아쉬울 따름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다음의 그림으로 박연폭포의 위용을 조금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정선이 그린 박연폭포(출처: 국립중앙박물관)

17~18세기에는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조선의 풍경을 독창적인 필치로 담은 그림이 유행하였는데요. 이러한 그림을 진경[참 진(眞), 풍경 경(景)]산수화라고 합니다. 이 그림은 바로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이 그린 박연폭포입니다. 시원한 물줄기 사이로 큼직 큼직한 바위들이 켜켜이 포개져 있네요. 폭포 아래에 지어진 정자의 크기로 박연폭포가 얼마나 웅장한 규모인지를 어림잡아 볼 수 있습니다.



박연폭포는 이번 편에서 소개해 드릴 인물, 황진이와 연관이 깊은 장소입니다. 개성 출신의 황진이는 이곳에서 자유분방한 성리학자, 서경덕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요. 서경덕은 황진이와 마찬가지로 개성 출신의 인물입니다. 조선의 이름난 성리학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스승 없이 스스로 높은 학문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43세의 늦은 나이에 비로소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지만 무슨 일이었는지 다시 개성으로 돌아와 송악산 자락에 '화담'이라는 이름의 초막을 짓고 본인 만의 학문에 열중하였다고 합니다.

서경덕의 비범함 때문이었을까요. 황진이는 서경덕을 몸소 찾아와 가르침을 구합니다. 당시 조선 여성으로서는 드물고 드물게 시와 학문에 능통했던 그는 그렇게 자석처럼 서경덕에게 이끌렸습니다. 어느 날 황진이는 서경덕에게 송도(개성)에 삼절(三絶, 세 개의 빼어난 것)이 있는데 무엇인지 아느냐고 넌지시 묻습니다. 서경덕이 모른다 답하자, 황진이는 "박연폭포, 서화담, 자신"이라고 답하죠. 황진이의 대범함에 서경덕은 허허 웃고 맙니다. 이처럼 박연폭포는 서경덕, 황진이와 함께 '송도의 삼절'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며 조선 후기부터 명소가 되었습니다.


이쯤에서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서경덕과 황진이는 단순히 사제지간에 불과하였던 걸까요? 황진이에 대한 이야기는 정사가 아닌 여러 야사를 통해서만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명확한 사실을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다만 황진이가 서경덕을 그리며 남겼다는 시 한 편이 전하고 있습니다.


내 언제 신의 없이 굴어 임을 속였길래
달이 기운 깊은 밤에 오려는 뜻이 전혀 없네
가을바람에 지는 잎 소리야 나인들 어찌 하리


가을바람에 낙엽이 지는 소리가 상대가 오는 발자국 소리인양 귀를 기울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시의 내용이 더없이 애틋합니다. 이러한 시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황진이와 서경덕의 관계는 상당히 특별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사실, 서경덕은 황진이가 연을 맺은 유일한 남성이 아니었습니다. 황진이는 일생 동안 어느 한 곳에 매이지 않고 다양한 남성들과 연을 맺어 왔습니다. 때문에 여성에게 한없이 팍팍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 사회에서 '자유연애'의 대명사로 회고되었죠. 서경덕 못지않게 누구보다도 자유분방한 기질을 타고났던 것입니다. 황진이, 그는 대체 어떤 생을 살아온 걸까요?

영화 황진이 속 한 장면(출처: 네이버 영화)

황진이가 기생의 길을 걷게 된 이유로는 다소 논란이 있지만 자신의 출신을 뛰어넘기 위한 나름의 대담한 선택이었다는 이야기가 힘을 얻고 있습니다. 황진이는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왕이 된 지 6여 년이 되는 시점에 태어났습니다. 황진이의 어머니는 노비 출신으로 양반가의 첩이 된 인물이었습니다. 서자, 얼자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조선 시대 정실부인이 아닌 첩의 몸에서 난 서자와 얼자는 이런저런 차별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황진이는 아들도 아닌 딸이었으니, 그에게 허락된 인생의 선택지란 어머니처럼 양반가의 첩이 되는 길 외에는 없었습니다. 운신의 폭이 좁디좁은 상황에서 황진이는 자신의 운명을 뒤바꿀 선택을 합니다. 온실 속 화초처럼 안정적이지만 갑갑한 생을 사느니 차라리 기생이 되어 자신의 타고난 예술적 재능을 마음껏 뽐내리라, 결심한 것입니다.


황진이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가 좋아 택한 모든 길을 꿋꿋이 걸어가는 당찬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황진이의 인물됨에 대한 기록 몇 개를 살펴보시죠.


"활달하고 기량이 커 남자와 같다."
"여자로서는 활달하고 큰 기량이 있어 협객의 풍모를 지녔다."
"진이는 비록 기생이나 성품이 고결하여 차림이 화려하지 않았고, 관청의 술자리에 나가더라도 세수만 하고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
"방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시정잡배가 천금을 준다 해도 원하지 않았다."


송공(지방관)이 그 어머니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서울에 있는 예쁜 기생과 노래하는 여자들을 모두 불러 모았고 이웃 고을의 수재와 고관들도 한데 모였다. 이에 붉게 분칠한 여인이 자리에 가득하고 비단옷 입은 사람들이 한 무리를 이루었다. 이때 황진이가 얼굴에 화장도 하지 않고 담담한 차림으로 자리에 나오는데, 천연한 태도가 사람들을 움직였다. 밤이 다하도록 계속되는 잔치에서 황진이를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광복 이후 제작된 황진이 영화 포스터(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이처럼 황진이를 묘사한 기록들은 그의 뛰어난 용모를 칭송하기보다는 고매한 성품을 앞다투어 전하고 있습니다. 자존감이 높아 하는 행동과 일마다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을 보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동하지는 않으시나요? 황진이에게는 바로 그런 매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황진이가 세상을 떠난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를 통해 그의 삶이 재연되는 이유도 이러한 매력 때문이었겠지요. 특별히 소개해 드리고 싶은 사실은 황진이가 남한에서 뿐만 아니라 북한에서도 소설로 창작되어 큰 인기를 누렸다는 점입니다.


영화 황진이 속 한 장면(출처: 네이버 영화)

그런데 황진이의 인기는 그가 세상을 살았던 시절에도 하늘을 찌를 듯하였습니다. 이는 황진이와 관련된 '유혹의 서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근대 여성이 주체가 되는 이야기의 소재로는 '유혹'이라는 키워드가 자주 등장합니다. 그의 매력이 어떠했는지, 그 매력에 푹 빠진 이는 얼마나 되었는지, 그럼에도 누구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는지 이러한 이야기들이 즐비하죠. 황진이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앞서 언급하였던 서경덕은 황진이의 유혹에도 꿋꿋했던 선비로 종종 회자되곤 했습니다.

서경덕과는 반대로 황진이의 매력을 뿌리치지 못한 남성들도 있었죠. 속세를 등지고 불교에 귀의하였지만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가 버렸다는 지족선사, 황진이의 매력에 버선발로 뛰쳐나왔다는 개성의 지방관 송공(앞에 소개해 드린 일화에서도 등장하였죠), 황진이와 단 한 달만 함께 지내고 돌아오겠다며 친구들과 약조했지만 결국 그를 떠나지 못한 문신이자 서예가인 소세양, 황진이의 유혹에 빠지지 않겠다 호언장담하였지만 황진이가 읊은 시 몇 수에 말 위에서 떨어지고 만 벽계수 등. 다양한 남성들의 이야기가 전합니다.

그런데 어딘가 좀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이렇게 후대에 남겨진 이야기들을 황진이 본인이 들었다면 어땠을 것 같으신가요? 아마 아연실색하거나 황당해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하고도 백년가약을 맺지 않은 황진이는 그저 물이 흘러가듯 자연스레 여러 인물들과 연을 맺어온 것은 아니었을까요. 다만 황진이가 보여 준 자유연애라는 선택지가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던 터라 많은 이들이 황진이의 일생을 '유혹의 서사'로 풀어낸 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황진이가 남긴 시들을 읽다 보면, 여러 이들과 인연을 맺어올 때마다 매양 진심으로 임하여 왔다는 사실이 절로 느껴집니다. 황진이의 시는 여러 개가 전하지만 그 진심이 여실히 드러나 있는 몇 가지만 선별하여 소개해 드려 볼까 합니다.


相思相見只憑夢 그리움과 만남이 다만 꿈에 기대니
儂訪歡時歡訪儂 내 임 찾아갈 때 임도 나를 찾아왔나 봐
願使遙遙他夜夢 언젠가 다른 날 밤 꿈속에서 거닐다가
一時同作路中逢 같이 길 떠나 도중에 다정하게 만나리
- 상사몽(相思夢, 서로를 그리는 꿈)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여
춘풍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어떠신가요? 그리운 연인을 꿈에서야 볼 수 있는 현실을 슬퍼하는 앞의 시나, 기나긴 동지밤을 이불속에 감춰 두었다가 연인이 오는 날 구뷔구뷔 펴서 함께하는 시간을 한없이 늘리고 싶다는 뒤의 시나 '유혹의 서사'로만 풀어내기엔 너무도 절절한 이야기들이 아닌가요?


영화 황진이 속 한 장면(출처: 네이버 영화)

이처럼 황진이는 16세기 조선 사회가 결코 품어 낼 수 없었던 자유로운 영혼, 그 자체였습니다. 황진이의 당당한 발자취는 30여 년의 짧은 생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는데요. 당시 중국 사람들도 부러워했던 금강산 여행의 소원을 이루어 내고자 재상의 아들이었던 이생원을 동지 삼아 함께 길을 떠나는 한편, 음악의 성취를 위해 명창 이사종과 6년 간 계약 동거를 하는 등 호쾌한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매 순간 치열하게, 또 진심으로 자신의 일상을 개척해 갔던 그에게도 끝은 찾아왔습니다. 병으로 몸져누운 황진이는 "내가 죽으면 곡을 하지 말고 상여는 북이나 음악으로 인도하라"라고 전했다고 합니다. 그 마지막 유언이 이루어졌는지, 지금의 기록만으로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이러한 유언을 남긴 황진이가 당대의 '이인(異人, 재주가 신통하고 비범한 사람)'이었다는 평이 함께 남아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박연폭포 이야기를 시작으로 짧게나마 황진이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많은 이들과 스스럼없이 연을 맺어 온 황진이(E), 시와 음악 등 예술적인 부문에 재능을 보인 황진이(N), 많은 이들과의 이별 앞에서 그 끝을 절절하게 슬퍼하고 그리워하면서도 의연히 제 길을 걸어갔던 황진이(T), 계획이 앞서기보다는 흘러가는 대로 대담하게 생을 마주하고 살아 낸 황진이(P).


이러한 사실들을 미루어 보아 황진이의 MBTI는 엔팁(ENTP)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어디까지나 재미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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