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로운 신념 때문에 단명한 선비
혹시 서원에 가본 적이 있으신가요? 지방 곳곳을 다니다 보면 근처에 유적이 있음을 알려 주는 적갈색 표지판을 흔하게 만나 보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중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호칭은 단연 '서원'이 아닐까 합니다.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을 포함하여 총 9개의 서원은 역사적 상징성과 중요성을 인정받아 201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습니다.
서원은 16세기부터 조선의 정치를 주름잡기 시작했던 '사림'이 지방에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든든한 디딤돌이었습니다. 저번 연산군 편에서 성종 때부터 정계로 나아가기 시작한 사림이 여러 차례 '사화'를 겪으며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고 말씀드렸었는데요. 이때마다 사림은 지방 곳곳에 세워진 서원에서 다시 훗날을 도모할 수 있었습니다. 당대 누구나가 존경할 만한 성현의 위패를 모신 곳인 서원은 사림이 한마음 한뜻으로 제자를 키우고 정치 여론을 모으며 꾸준히 세력을 키워 나갈 수 있었던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심곡서원은 사림의 '전형'을 만들었다고도 말할 수 있는 조광조의 위패를 모신 서원입니다.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여느 서원과 다르게 심곡서원은 오늘날 주거단지 가운데 외로이 우뚝 서 있습니다. 경치 면에서는 다소 아쉬울 수 있으나 의미 면에서는 결코 다른 서원에 뒤지지 않는 곳이라 감히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6세기 연산군이 자초한 때 이른 위기를 극복해 나가고자 제 한 몸을 기꺼이 바쳤던 조광조의 혼이 서린 곳이기 때문이지요. 심곡서원의 지척에는 조광조의 묘가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전라남도 화순 능주의 유배지에서 조광조는 쓰디쓴 사약을 받았습니다. 38세, 세상을 등지기에는 아직 한창인 나이였습니다. 연산군을 내치고 새로 즉위한 국왕, 중종과 함께 이상적인 정치를 펴 나가리라는 조광조의 꿈은 그렇게 하루아침의 이슬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임금의 사약을 받은 조광조는 행여 왕이 자신에게 남긴 다른 글은 없을까 거듭 물었습니다. 자신을 총애했던 임금이 하루아침에 등을 돌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참 어려웠던 것이죠.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차디 찼습니다. 임금이 그에게 남긴 건 전혀 없었으니까요. 조광조는 체념한 듯 사약을 받들기 전 글을 하나 남겨도 되는가 묻습니다. 다음은 생사의 경계에서 조광조가 써 내린 시입니다.
愛君如愛父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였고
憂國如憂家 나라를 내 집처럼 근심하였네.
白日臨下土 해가 아래 세상을 굽어보니
昭昭照丹衷 충정을 밝게 비추리
심곡서원의 '일소당'은 조광조가 남긴 시에서 '일소' 두 글자를 따와 이름을 지었습니다. 시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해가(日일) 조광조의(나아가 선비들의) 충정을 비추는(昭소) 곳'이라는 뜻이 되겠네요. 유생들은 심곡서원 일소당에서 조광조의 못다 이룬 꿈을 그리는 동시에 좋지 못했던 그의 말로를 스스로 경계하며 열심히 학문을 연마하지 않았을까요?
조광조, 그는 중종이 왕이 된 지 10년이 되어 가는 시점에 혜성처럼 등장했습니다. 조광조가 조정에서 모두가 주목하는 1인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건 국왕 중종이 그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중종은 최초로 신하들이 일으킨 '반정'을 통해 왕이 된 인물이었습니다. 어두웠던 연산군의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이 정치를 이끌어갈 임무가 무거운 짐처럼 그의 어깨에 짊어졌죠. 그러나 자신의 의지대로 순조로이 개혁을 펴 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중종은 비상시국에 신하들이 점찍어 추대받은 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스스로 왕좌에 앉은 세조와는 상황이 많이 달랐죠. 중종을 왕위에 올린 신하들은 '공신'으로 책봉되어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었습니다. 중종은 이 과정에서 사랑하는 왕비마저 잃어야 했습니다. 눈물로 엄혹한 정치의 세계 속에 발을 들인 것이죠.
하지만 중종도 그리 만만하지는 않았습니다. 실록에서는 중종이 상당히 영민한 왕이었다는 사실을 수차례 언급하고 있습니다. 행정 사무에 밝아 오류를 단번에 찾아내기 일쑤여서 신하들이 진땀을 뺐다는 등 여러 일화가 전하죠. 이처럼 실무에 유능했던 중종은 정치력을 갈고닦아 왕이 된 지 10년 만에 정치의 주도권을 잡고자 밑작업을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중종의 눈에 들어온 인물이 바로 조광조였습니다.
그렇다면 조광조의 어떤 점이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요? 조광조는 그야말로 우직한 선비의 전형, 그 자체였습니다. 성리학을 착실하게 공부한 그는 '내 마음의 도덕적 판단이 한치의 착오도 없게 되면 천하의 모든 일이 모두 이치에 맞게 된다'고 생각했죠. 성리학은 우주의 질서와 인간의 심성을 깊이 연관 지어 연구하는 학문으로 유학의 한 갈래였습니다. 오늘날의 민주주의처럼 성리학은 조선이 국가를 운영하는데 바탕이 되는 정치 철학이었죠. 오늘날의 시선에서 보면 성리학에 입각한 조광조의 생각이 이상적이기만 할 뿐 뜬구름을 잡는다,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조광조는 현 시국에서 필요한 개혁은 무엇일까, 끊임없이 고민하는 실천파 성리학자였습니다. 그는 중종의 시대가 앞으로 조선의 운명을 가름할 중요한 시기라 보았죠.
"세종 이후로 선비들의 습성이 퇴락하여 세조와 성종 대에는 훈구의 신하들이 줄지어 자리를 잡고 폐습을 쌓았으며, 연산 때는 그 폐단이 더 고질화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 병폐가 점점 고쳐지고 있습니다. 엄격하게 금지하고 과감히 끊어내야 합니다."
"연산군 때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입니다. ... 올바를 선비들을 한낱 지푸라기처럼 쉬이 죽였기 때문에 조정의 신하들이 앞을 다투어 침묵을 지키고 자신을 보전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조광조는 임금과 신하가 마치 물과 물고기처럼 거리낌 없이 소통하고 조화를 이룬다면 다시 이상적인 시대가 올 것이라 보았습니다. 중종도 그 말에 적극 동의했습니다. 중종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조광조는 고공 행진을 이어갑니다. 짧게는 사흘, 보통은 서너 달 만에 요직에서 요직으로 계속해서 승진했죠. 중종은 조광조가 이야기할 때면 '얼굴빛을 가다듬으며 들었고, 날이 저무는 줄도 모를 정도로 논설할 정도'로 그를 신뢰하고 총애했습니다.
그러나 견고할 것만 같았던 중종과 조광조의 관계에도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세상을 바꾸어 보고야 말겠다는 조광조의 진심을 의심할 사람은 당대 아무도 없었지만 문제는 그 내용이 너무 급진적이었다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조광조의 대표적인 개혁안은 '현량과 실시'와 '위훈 삭제'였습니다. 역사 교과서에서도 흔히 확인해 볼 수 있는 주제지요.
현량과는 땅이 좁아 인물이 적은 조선의 특성상 현명한 인재를 추천받아 귀천을 가리지 않고 뽑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나온 인재 등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조광조를 시기하는 일부 신하들은 그가 자신을 따르는 선비들로만 조정을 채우려 한다며 모함하기도 하였죠.
위훈 삭제는 중종반정으로 공신이 되어 권력을 누려 온 훈구 세력의 실상을 파헤치고 조사하여 거짓으로(僞 거짓 위) 훈장(勳 공 훈)을 받은 인물이 있다면 그를 공신 목록에서 삭제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상당히 파격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정을 주도한 신하들 대부분은 당시 조정의 일선에서 정치를 이끌고 있었죠. 조광조는 이들을 거의 공개적으로 저격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중종조차도 '위훈삭제'를 바로 받아들이기엔 떨떠름하지 않았을까요? 누구도 중종 자신이 그 반정을 통해 왕좌에 앉은 장본인인데 말이죠. 조광조의 화살은 중종이 아닌 공신들을 겨누고 있었다고는 해도 썩 유쾌하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망설이는 중종 앞에서 조광조는 기필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중종에게 "신은 귀양 가거나 죽더라도 참으로 마음에 달게 여기겠습니다. 빨리 들어주소서"라고 극언까지 하며 중종을 몰아붙였죠. 조광조는 한 번 마음먹은 일은 꼭 관철시키고야 마는 대쪽 같은 성미의 소유자였습니다.
조광조는 국왕의 총애를 받아 매일 소대 했다. 그때마다 반드시 의리를 끌어 비유하고 경전을 종횡으로 인용하면서 끊임없이 말해서 다른 사람은 한 마디도 낄 수 없었으며, 한겨울이나 한여름이라도 한낮이 되도록 중지하지 않았다. 입시할 때 드린 말은 윤허받지 않은 경우가 없지만, 함께 입시한 사람들은 매우 괴로워했으며 모두 싫어하는 기색이 있었다.
건의한 것은 반드시 국왕의 동의를 얻고자 해서 아침에 경연을 시작하면 해가 늦은 뒤에야 마쳤다. 그래서 국왕은 피로와 권태를 느꼈으며, 하품을 하거나 용상에 기대 신음하기까지 했다.
- 『기묘록보유』
물론 조광조가 언제나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는 꼿꼿한 모습을 보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개혁을 완수하고자 맹목적으로 집착하기보다는 현실의 다양한 변수를 고려하고자 노력했고 자신을 앞세워 이런저런 직설적인 주장을 토해 내는 어린 유생들의 치기 어린 모습을 우려하기도 했죠.
그러나 결국 조광조에 대한 중종의 마음은 완전히 돌아서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루아침에 중종은 조광조의 직분을 빼앗고 멀리 귀양 보낼 계획을 세우고야 맙니다. 소식을 들은 유생들은 경복궁의 문을 밀고 들어와 통곡했습니다. 중종은 그런 유생들을 의금부에 가두어 벌을 주고는 일을 빠르게 마무리 짓고자 합니다.
신하들은 조광조를 사형하고자 마음을 굳힌 중종을 뜯어말렸습니다. 조광조가 아무리 경솔했다고는 하나 목숨을 앗아갈 정도의 죄를 짓지는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신하들은 조광조의 올곧은 선비로서의 면모를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신하들의 만류에 중종은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리기로 한 결정을 잠시 물리기도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중종은 "다른 사람을 다 용서할 수 있어도 조광조만큼은 절대로 안된다"며 확고한 마음을 보이죠.
180도 변한 중종의 태도에 신하들은 의아해했습니다. 실록에서는 '평소 중종이 조광조를 아들처럼 대하였는데 조금도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며 많은 이들의 당혹스러움을 그대로 전하고 있죠. 옥에 갇힌 조광조는 글을 써서 억울함을 토로합니다.
“우리 임금께서 지니신 성인의 면모를 믿고 어리석은 충정을 다하였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시기를 받으면서도 다만 임금이 계신 것만을 알아 다른 일은 생각하지 않고 우리 임금을 요순과 같은 임금(옛날 중국 왕조에서 이상적인 정치를 편 황제들)으로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일신을 위해 한 일이겠습니까? 하늘의 태양이 밝게 비추고 있습니다. 다른 사특한 마음은 없었습니다.”
- 『중종실록』
하지만 조광조의 애절한 상소문도 중종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처럼 허무하게도 조광조의 4년 동안의 짧은 관직 생활은 영영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를 따르던 신하들과 선비들도 줄지어 화를 입게 되었죠. 이를 기묘년에 사림이 화를 입었다고 하여 '기묘사화'라고 합니다.
이처럼 조선을 새롭게 바꾸어 보겠다는 조광조의 꿈은 미완에 그쳤습니다. 후대에 조광조는 어떻게 기억되었을까요? 16세기 조선의 성리학을 주름잡았던 율곡 이이는 조광조의 말년을 참으로 안타까워했습니다. 조광조가 의논하는 것이 너무 날카롭고 일도 점진적으로 하지 않아 화를 입고야 말았다는 게 이이의 조광조에 대한 평이었습니다. 이이와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 이황도 조광조를 '시기와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무모했다'고 평했죠.
그럼에도 조광조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끝내 자신이 학문에서 배운 의리를 지키고자 하였던 올곧은 선비라는 점은 이이와 이황은 물론 후대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정하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게 조광조는 선조 대부터 본격적으로 정치를 이끌기 시작한 사림들의 모범과 전형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심곡서원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짧게나마 조광조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보다는 학문 속에서 이상적인 정치의 방향을 찾아내고자 하였던 조광조(I), 열심히 학문을 연구하면서도 시국을 바꾸어나갈 수 있는 구체적인 개혁안을 끊임없이 고민한 조광조(S),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밀고 나가고자 하였던 조광조(T), 그러나 아무런 예정 없이 비극적인 말로를 마주하게 된 조광조(P).
이러한 사실들을 미루어 보아 조광조의 MBTI는 잇팁(ISTP)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어디까지나 재미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영화 자산어보는 조광조와 관련이 없는 영화입니다.
다만 무드가 비슷하여 활용하였다는 점을 양해해 주시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