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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Jan 16. 2024

8. 조선의 ISFJ(이순신)

죽음만을 기다린 쓸쓸한 명장

이순신의 MBTI는 무엇일까?

한반도 남쪽 끝, 경상남도 통영에서 한산도로 떠나는 배는 매 정시마다 있습니다.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조용하고 잔잔한 바다를 가로지르다 보면 이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을까, 상념에 빠지기도 합니다. 바다와 볕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윤슬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다시 바다를 곁에 둔 오솔길을 죽- 따라 걸어 들어가면 제승당을 만나게 됩니다. ‘승리를 만드는 곳’이라는 뜻의 제승당은 이순신이 동료, 부하 장수들과 함께 작전을 논의하던 집무실이었습니다. 원래 이름은 ‘운주당’이었는데요.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0여 년이 지난 1740년, 당시 통제사로 부임한 조경이 이순신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면서 ‘제승당’이라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중 하나인 수루(출처: 문화재청)

제승당 우측으로는 한산도가 마주한 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수루가 위치해 있습니다. 수루 안으로 들어서면 이순신이 남긴 시를 확인해 보실 수 있지요.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왜군이 부르는 노래)는 남의 애를 끊나니.
- 한산도가

깊은 밤 홀로 수루에 머물며 고뇌하고 시름했을 이순신의 마음이 온전히 느껴지는 것만 같습니다. 이순신, 그 이름 세 글자는 그가 세상을 등진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환히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생전 끝도 없이 피로 얼룩진 전투에 나서야만 했던 그는 스스로의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을까요? 어떠한 생각으로 모든 시간들을 견뎌 왔을까요?



E/I 몰락한 집안에서 무인을 꿈꾸었던 소년


이순신은 서울 건천동, 오늘날 을지로 3가 역 근처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명장으로 이름을 떨친 이순신, 그 유명세 탓에 이순신의 집안도 무인 집안이 아니었을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이순신의 6대조 이변, 증조부 이거, 할아버지 이백록은 대대로 문신의 이력을 이어왔습니다. 그렇게 탄탄할 것만 같았던 집안에 갑자기 예상치도 못한 화가 미치고 말았습니다. 사림의 대표 조광조의 목숨을 앗아간 기묘사화를 기억하시나요? 평소 이백록은 사림 세력이 내세운 개혁에 크게 동의하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백록이 성종의 제삿날에 아들의 혼인을 치렀다는 죄목으로 장을 맞게 되죠. 이백록은 모진 처벌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충남 아산으로 거처를 옮긴 이순신의 집안에는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이정은 이백록의 억울함을 백방으로 호소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어두운 과거는 묻고 문과에 뜻을 품어 보려 하였지만 끝내 낙방하고 말았지요. 자신이 못 다 이룬 꿈을 아들들 이루어 주길 바라서였을까요. 이정은 중국의 태평성대를 이끌었다고 전해지는 임금들의 이름을 따 아들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차례로 이희신, 이요신, 이순신, 이우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셋째 이순신은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문과보다는 무과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것 같습니다. 이순신의 고향 친구이자 전쟁 직전 이순신을 수군 대장의 벼슬에 추천한 류성룡의 증언을 들어 보겠습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영특하고 활달했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전쟁놀이를 했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해 어른들도 그를 꺼렸다.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고자 했다.”


21세가 되는 해 이순신은 붓을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무과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산에서 이순신과 함께 무과를 준비하던 또래의 소년들은 어딘가 남달라 보이는 그를 믿고 따랐습니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쓴 행록을 보면 '함께 수련하던 소년들이 종일 자기들끼리 농담과 장난을 하면서도 이순신에게는 감히 반말도 하지 못했고 존경했다.'라는 내용이 전합니다.

그렇게 7년이 한 번의 낙방을 경험한 후 이순신은 32세의 나이에 비로소 무인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이순신의 앙숙으로 유명한 원균이 27세의 나이에 무과에 합격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보면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순신의 딱딱하고 올곧은 성품은 관직 생활마저 순탄치 못하게 했죠.

이순신의 친필(출처: 오죽헌시립박물관)

이순신은 청렴결백의 아이콘이었습니다. 상사가 부정을 저지르면 사사건건 시비를 따지며 결코 넘어가지 않았죠. 무관 초임 시절 직속상관이었던 서익의 관직 청탁을 거절한 일, 이순신을 눈여겨보던 병조판서(오늘날 국방부 장관)의 혼인 제의를 거절한 일, 상사가 관아의 나무로 거문고를 만드려 하자 꾸짖은 일 등을 사례로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이후 서익은 이순신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관직에서 쫓아내는데 혈안을 올리기도 합니다. 결국 이순신은 관직을 박탈당하고 더 낮은 품계에서 벼슬을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죠.

한편 조선 성리학의 대가, 율곡 이이도 이순신에게 고배를 마신 일화가 전합니다. 이이는 이순신이 자신과 같은 덕수 이 씨라며 류성룡을 통해 그를 만나보고 싶다 청해왔습니다. 당시 이이는 모든 관리의 인사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이조판서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좌천당한 이순신에게 기회가 왔다고도 할 수 있었죠. 하지만 이순신은 "같은 성씨라 만나볼 수는 있겠지만 이조판서로 있는 동안은 옳지 못하다"며 거절했습니다. 류성룡도 이이도 이러한 이순신의 완고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 않았을까요?


N/S  전라좌도 수군의 대장이 되다


1590년 조선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쉬이 무시하곤 했습니다. 몇 차례에 걸쳐 대마도가 경고를 해왔음에도 꿈쩍 하지 않았죠. 왜구를 무찌른 신궁이 세운 나라답지 않게 오랜 세월 평화가 지속되면서 조선의 무비 상태는 날로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군대의 의무마저 제대로 지지 않았죠.

그래도 전쟁이 일어날 거란 소문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1년 뒤 임금 선조는 장수의 역할을 해낼 만한 인재를 추천하라 명하였습니다.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한 지도 어느덧 10년, 역량에 비해 늘 낮은 관직에 머물고 있던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던 류성룡은 그를 전라좌수사로 추천했습니다. 전라좌도의 수군을 이끄는 장수의 직이었죠. 이순신의 나이 47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영화 한산의 한 장면(출처: 네이버 영화)

수군을 이끄는 대장이 된 이순신은 소문이 어떠하던 직무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자 했습니다. 군영의 식량과 무기를 두둑이 준비하는 것은 물론, 조선 수군의 전함인 판옥선을 보완하여 설계하고 건조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판옥선에 지붕을 씌운 형태인 거북선도 이순신에 의해 새롭게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하루하루 실전과도 같은 훈련도 빼먹지 않았죠.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순신이 거북선 함포 사격 훈련을 마친 것은 전쟁이 일어나기 단 보름 전의 일이었습니다.


F/T 벼랑 끝으로 내몰린 명장


1592년 4월 대규모 일본군이 부산 바다로 밀려 들어옵니다. 임진왜란, 길고 긴 7년 전쟁의 시작이었죠.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북쪽으로 올라오는 일본군 앞에 조선 정부는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명장이라 믿었던 신립마저 충주 탄금대에서 대패했고, 선조는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난길을 떠납니다. 의주에서는 명나라로 넘어가 후일을 도모하겠다 신하들과 연일 회의를 열곤 했지요.  

혼란에 휩싸인 조선 정부에 첫 승전보를 알린 건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었습니다. 선조는 뛸 듯이 기뻐했지요. 전쟁이 시작되고 명나라와 일본이 휴전 협상에 돌입하기 전까지 이순신의 승전 행보는 이어집니다. 승리의 서사를 읊기에는 진부할 정도로 오늘날 우리는 탁월한 전략과 전술을 펼친 명장 이순신의 면모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순신이 남쪽의 바다를 꽉 틀어쥐고 있었기에 북쪽으로 올라간 일본군은 발만 동동 구르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조선 정부가 청한 명나라의 원병이 도착했고 일본군에게 빼앗긴 평양성을 되찾습니다. 그런데 명군도 남의 나라 전쟁에서 많은 피를 보고 싶진 않았죠. 그렇게 일본군과 명군의 입장이 맞아떨어졌습니다. 지지부진한 강화 협상의 시작이었습니다.

영화 노량의 한 장면(출처: 네이버 영화)

명군은 강화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군이 일본군을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나라 땅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철천지원수를 지척에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선조는 이순신에게 일본군이 똬리를 틀고 있는 남해안 왜성을 공격하도록 몇 번 명을 내렸습니다. 이순신의 좋지 않은 여건에도 선조의 명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당시 수군 사이에서는 전염병이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길어진 전쟁, 청결하지 못한 환경 속에서 수군은 적군의 칼이 아닌 병마 때문에 무수히 목숨을 잃어 갔죠. 이순신 자신도 전염병을 피해 갈 수 없었지만 다행히도 털고 일어납니다. 그때부터 전염병이 앗아 간 수군 병력을 메우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합니다. 언제고 전쟁이 다시 시작될 수도 있으니까요.

이순신의 예견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명과 일본은 결국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했고 협상은 결렬되어 허망하게 3년을 날렸습니다. 격노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다시 침략할 것을 명합니다. 이순신의 존재가 두려웠던 일본군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습니다. 선조가 이순신의 벼슬을 빼앗고 원균에게 그 직무를 그대로 물려준 것이죠. 일본군에게는 쾌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순신이 한양으로 끌려가 호된 문책을 받는 동안 전투는 시작되었고 원균은 참패하였습니다. 수로를 뚫은 일본군은 전라도로 들어가 끔찍한 살육전을 벌였습니다. 조선의 곡창지대 전라도가 일본군에게 넘어간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수군의 피해도 그야말로 처참했습니다. 강화협상기 이순신이 필사적으로 모은 병력의 피해는 말도 못 할 수준이었고 거북선은 전멸, 판옥선은 단 13척만이 남았습니다.


P/J 모두가 예견하지 못했던 죽음


어떤 사연인 걸까요. 사실 선조는 전부터 이순신을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자신의 위신은 하루가 다르게 떨어져 가는데 매 전투마다 수많은 일본군을 수장시켜 버리는 이순신의 인기는 날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선조는 전쟁 중 민심이 비뚤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주 감지했습니다. 북방에서는 백성들이 왕자 임해군, 순화군을 잡아 일본군에게 넘겨준 사례마저 있었으니까요.

이순신이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을까, 선조는 노심초사했습니다. 남해안을 순찰하고 온 신하들에게는 "이순신이 혹시 일을 게을리하지는 않는가?" 하며 흠을 찾아내고픈 심정인 것처럼 쏘아붙이곤 했지요. 결국 이순신을 향한 선조의 미움은 기폭제가 되어 일을 그르치고 말았습니다. 협상이 흐지부지 되고 다시 전운이 감돌던 때였습니다. 선조는 일본군이 넘긴 정보에 따라 수군을 출정시키라며 이순신에게 명령을 내렸죠. 하지만 이순신은 쉬이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만약 일본군이 꾀를 부린 거라면 애써 재건한 수군이 궁지에 몰릴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으니까요. "이순신은 용서할 수 없다." 선조의 명으로 이순신은 한양으로 끌려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균이 칠천량에서 패하자 선조는 다시 이순신을 남쪽으로 돌려보냅니다. 풀려나던 날, 이순신은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술을 마셨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자신만을 바라보는 부하와 동료, 백성들, 다시 무거운 몸을 일으켜 남해안으로 백의종군을 떠납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의 부고가 전해집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한양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에 여수에서 배를 타고 올라가던 중 운명을 달리했습니다. 나이 80의 노구가 버텨주지를 못한 것이죠. 이 날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의 내용은 비통, 그 자체였습니다.


4월 16일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돌아오면서 마을을 바라보고 통곡했다.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 소리를 내어 울부짖었다. 다만 어서 빨리 죽었으면 할 따름이다.
4월 19일  어머니 영전 앞에 울며 하직했으나 어찌하겠는가. 천지간에 어찌 나 같은 이가 있겠는가. 일찍 죽는 것보다 못하다.
영화 명량의 한 장면(출처: 네이버 영화)

칠천량에서 허망하게 부하, 동료, 군사들을 모조리 잃었는데 어머니 부고까지 들려오니 그저 죽음만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매서운 세상은 이순신을 더욱 궁지로 몰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치른 전투가 바로 명량해전입니다. 명량으로 나아가기 전 선조는 "수군의 병력이 적으니 권율 휘하의 육군으로 들어가라", 또다시 믿기지 않는 명을 내립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항명합니다. "신에게는 아직 13척의 배가 있습니다." 자신을 미워하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승리해야만 하는 전투에 나아갔던 이순신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13척 133척, 명량해전은 기적과도 같은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이순신 본인도 "천운이었다."이야기했죠.

영화 노량의 한 장면: 아들 이면의 최후(출처: 네이버 영화)

그러나 슬픈 소식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명량의 패전 소식을 들은 일본군은 이순신이 청년 시절을 보낸 충남 아산으로 가 마을을 불태우고 이순신의 셋째 아들 이면을 살해했습니다. 이순신은 또다시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10월 14일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올바른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이것은 이치가 잘못된 것이다.  천지가 캄캄하고 태양이 빛을 잃는구나. 슬프다, 내 어린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
10월 16일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가 된다. 마음 놓고 통곡할 수도 없으므로, 영 안에 있는 강막지의 집으로 갔다.

하지만 슬퍼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조선을 넘어 명을 정벌할 꿈을 꾸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전쟁의 명분을 잃어버린 일본군은 모두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이순신에게 남아 있는 건 전쟁에서 죽어 간 수많은 이들의 원한뿐. 그는 그렇게 마지막 전투에 나섰습니다.

영화 노량의 한 장면(출처: 네이버 영화)

일본군의 철수가 명백히 예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마지막 전투는 순전히 이순신의 의지로 치러졌습니다. 이순신과 함께 조명 연합 수군을 꾸렸던 진린은 불필요한 희생을 요하는 전투를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원군을 청하러 가는 일본군 측의 염탐선을 눈감아 줍니다. 사전에 일본군에게 뇌물까지 받은 상황이었죠.

그렇게 일본 측의 원군이 온 상황, 결코 유리하지 못한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전 전투에서 이순신에게 두 번이나 목숨을 빚진 진린도 멀찍이서 전투를 관망하다가 이순신의 용맹함에 감화되어 싸움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노량에서 벌어진 이 싸움의 결말을 압니다. 이순신은 노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총탄에 맞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실록은 그때의 전투를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순신이 진린에게 말하기를 '적의 구원병이 수일 내에 당도할 것이니 먼저 요격하겠습니다'하니, 진린이 허락하지 않았으나 이순신은 듣지 않고 요격하기로 결정하고서 나팔을 불며 배를 몰아가자 진린은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는데, 중국 배는 선체가 작은 데다 뒤쪽에 있으므로 그저 성세만 보였을 뿐이고 진린과 등자룡 두 사람이 판옥선을 타고 가서 싸웠다고 합니다."
- 선조실록 1599년 2월 2일


이 소식을 들은 선조는 수군이 크게 이겼다는 소식이 과장된 것은 아닌지 다시 물었습니다. 여전히 이순신에 대한 노여움이 풀리지 않았던 것이죠. 만약 이순신이 노량에서 죽지 않고 살았다면 향후 둘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역사에 만약은 없다곤 하지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이순신의 운구 행렬이 충남 아산으로 이어질 때 많은 백성이 '마치 제 부모가 세상을 떠난 양' 그 곁을 지켰습니다. 너무 많은 백성이 몰려들어 행렬이 나아가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전하죠. 진린도 행렬을 따라 아산까지 와 묏자리를 정해 주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긴 전쟁도, 이순신의 고통스러운 삶도 끝이 났습니다.


지금까지 한산도 제승당 이야기를 시작으로 짧게나마 이순신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았지만 스스로의 신념을 뚝심 있게 지켜가며 많은 사람들과 교유하지 않았던 이순신(I),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의 책임과 임무를 다하고자 하였던 이순신(S), 개인의 삶은 비통으로 얼룩졌음에도 동료와 부하, 백성에 대한 사랑으로 다시 일어선 이순신(F), 매 전투마다 철두철미한 대비로 승리로 거두었지만 노량에서 아무도 예견하지 못한 죽음을 맞이한 이순신(J).


이러한 사실들을 미루어 보아 이순신의 MBTI는 잇프제(ISFJ)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 어디까지나 재미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명성이 남다른 이순신은 누구나가 존경해 마지않는 인물이지요. 저 역시 역사를 깊이 공부하면서 더욱 흠모하게 된 분입니다. 그래서 이번 글을 쓸 때 가장 고민도, 부담도 많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순신이 기적적으로 써내린 백전백승의 신화보다는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 그가 겪었을 고뇌와 슬픔까지도 공감할 수 있는 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썼습니다.

날마다 저마다의 전장에서 자신만의 신념을 지켜내고자 고군분투하고 계시는 모든 분들께 이순신의 삶이 큰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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