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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Feb 06. 2024

10. 조선의 ENFJ(정여립)

이름을 불러선 안될 조선의 볼드모트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겹겹이 마주하고 있고 그 사이로 맑은 물이 휘돌아 흐릅니다. 전라북도 진안 죽도. '도'라는 이름답게 산맥의 정체성은 온 데 간데없고 마치 섬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림 같은 이곳, 죽도에서 용서받지 못할 사상을 꿈꾸었던 선비가 끝내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정여립. 25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왕의 자문을 담당하는 기관인 홍문관의 관리로 이력을 쌓아 가던 그는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는 인재 중의 인재였습니다. 그런 그가 39세의 젊은 나이에 벼슬을 그만두고 내려와 죽도에서 생을 마감하고 만 것입니다.


진안 마이산 풍경(출처: 전북특별자치도 이미지 갤러리)

관군의 수색을 피해 도망치던 정여립은 죽도의 풀숲에 납작이 엎드려 있었습니다. 이미 사방은 관군에 손아귀에 들어간 후였습니다. 후일을 도모할 수 없다고 직감한 정여립은 칼을 거꾸로 뒤집어 땅 깊숙이 꽂아 넣었습니다. 정여립을 잡아 올 임무를 띠고 있던 현감 민인백은 그를 애써 타일렀습니다. 정부에서 억울함을 잘 보살펴 줄 테니 순순히 따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여립은 아무런 미련 없이 칼을 향해 몸을 던졌습니다.

민인백의 말이 무색하게 이미 생과 사의 경계를 넘은 정여립에게 가혹한 형벌이 더해졌습니다. 정여립의 시신은 갈기갈기 찢겨 무기와 병기를 제조하던 관아인 군기시 앞에 전시되었습니다. 군기시는 오늘날 서울 시청 자리에 있었습니다.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는 역모를 꾀하면 어떻게 되는 건지, 모든 신하에게 단단히 본을 보이고자 하였습니다. 100여 일 동안 정여립 사건에 연루된 자들을 조사하고 벌하는 피로 얼룩진 무대가 열렸습니다. 정여립은 타인에게 받은 편지를 버리지 않고 모두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선조의 의심을 피해 갈 수 없었죠. 죽은 사람은 50명, 귀양을 간 이는 20명, 옥에 갇힌 자는 400여 명이었습니다. 8살의 코흘리개 아이부터 80세의 연로한 노인까지 엄정한 죽음을 피해 가지 못했습니다.

선조의 정여립에 대한 분노는 유별났습니다. 그의 부모와 자손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그가 살던 집은 허물어져 평평한 터로 변하였습니다. 정여립의 본가 동래 정씨 일가는 고향에서 쫓겨나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후대의 족보에도 정여립의 이름은 실리지 못했습니다. 정여립이 죽은 지 먼 훗날이 되어서도 정여립은 그의 이름 석자가 아닌 '정적(정씨 성을 가진 적)'이라 일컬어졌습니다. 조선에 볼드모트가 있다면 바로 정여립이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정도였죠. 이처럼 정여립은 조선 시대 역적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E/I 책과 사람을 좋아하던 짓궂은 청년

정여립이 살던 시기는 정부의 신하들이 각각 서인과 동인이라는 붕당으로 나누어질 때였습니다. 전편에서 율곡 이이가 얼어붙어만 가던 서인과 동인 사이를 다시 이어보고자 골몰하였었다고 말씀드렸죠. 그러나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습니다. 서인과 동인의 첨예한 갈등 속에 선조 시기의 역사는 두 번 기록되었습니다. 훗날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인조를 추대한 서인이 실록을 수정하는 사업을 추진한 것입니다. 선조실록은 동인의 입장만을 반영하고 있다는 게 그 이유였죠. 이렇게 해서 다시 쓰인 실록이 '선조수정실록'입니다.

선조수정실록(출처: 국립고궁박물관)

그런데 정여립은 선조실록에서도 선조수정실록에서도 좋게 쓰이지 못했습니다. 정여립은 역적의 신분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였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숨은 사연이 있었습니다. 정여립은 본래 서인이었습니다. 율곡 이이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앞길이 탄탄대로인 청년이었죠. 그러나 어쩐 일인지 이이가 세상을 떠나자 정여립은 변절한 뒤 동인에 가담하여 이이의 흉을 보았습니다. 배신자는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법입니다. 서인도, 동인도 정여립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남아 있는 기록을 바탕으로 정여립의 인물됨을 객관적으로 파악해 보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떤 책을 펼쳐 보아도 그를 맹비난하고 있기 때문이죠. 정여립에 대한 기록을 살펴볼 때는 곳곳에 서려 있는 미움의 이면을 살필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주의 사항을 말씀드렸으니 정여립의 어린 시절을 여러 기록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정여립의 어머니는 그를 낳기 전 이상한 태몽을 꾸었습니다. 고려 사회를 혼란으로 빠트렸던 정중부가 연일 꿈에 나타났던 것이죠. 정중부는 무신정변을 일으킨 장본인이었습니다. 범상치 않은 태몽을 바탕으로 세상에 난 정여립은 7세가 될 무렵부터 잔인한 면모를 보여 주었습니다. 어느 날 소년 정여립이 까치의 새끼를 잡아 뼈를 부러트리고 살을 찢어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 여종은 정여립의 행동을 그의 아버지께 일러바칩니다. 이에 분개한 정여립은 아버지가 집을 비운 사이 여종을 살해하였죠.

정여립의 거친 행보는 그가 15세가 되던 해에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당시 정여립의 아버지는 고을 현감으로 부임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여립이 아버지의 일을 마음대로 처단하였죠. 아버지는 정여립의 행동이 내키지 않았지만 고개를 내젓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청년이 된 후로는 여자 문제까지 일으켰습니다. 전라북도 완주 출신인 정여립은 인근 고을 김제에 살던 여인에게 장가를 들었습니다. 이때부터 완주를 떠나 김제에서 살기 시작하였죠. 김제에서는 남편을 잃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미모의 과부 소문이 돌았습니다. 정여립은 과부의 정절은 생각지도 않고 미모를 탐하여 그를 냉큼 첩으로 맞이하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정여립의 행실이 잘못되었음에도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저 혀를 내두를 뿐이었죠.

자, 어떠신가요? 이처럼 부정적인 이야기로만 가득 찬 그의 유년과 청년 시절을 균형 있게 평하기에는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정여립이 현감이었던 아버지의 일을 마음대로 처리하였다는 일화나 과부를 첩으로 들였다는 일화는 다르게 볼 여지가 있습니다. 현감의 일을 처리할 만큼 그는 어려서부터 실무에 밝았고, 일찍이 남편을 잃어 생계가 막막하던 여인을 두 번째 아내로 맞이하였다고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죠.

실제로 나쁜 내용이 일색인 정여립을 회상하는 기록 중에는 미처 은폐하지 못한 긍정적인 요소도 얼핏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정여립이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도가 남달랐다는 기록이나 일찍이 율곡 이이와 그의 절친한 친우이자 대학자인 우계 성혼이 정여립의 총명함을 알아보았다는 이야기 등이 있습니다. 여러 책을 두루 읽어 박학다식하였던 정여립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N/S 왕의 존재에 의문을 품

영화 자산어보의 한 장면(출처: 네이버 영화)
"정여립은 총명하고 재치가 있었으며 변설을 잘하였다."
"정여립은 일세를 하찮게 보아 그의 안중에 완전한 사람이 없었다. 경전을 거짓으로 꾸미고 의리를 속였는데 논변이 바람이 날 정도로 잽싸서 당할 수가 없었다."
- 선조수정실록

정여립은 종종 성리학 경전에 대한 남다른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도통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리곤 했죠. 정여립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끌어안을 위인은 못 되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타인을 낮추어 보기 일쑤였던 듯합니다. 일찍이 이이는 이러한 정여립의 오만방자한 성향을 걱정하였습니다. 이이가 정부의 인사를 도맡아 관리하는 이조판서의 관직에 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이이는 선조에게 정여립이 학문이 넓고 재주가 있다며 그를 적극 추천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이 "비록 남을 업신여기는 병통이 있기는 하지만 병통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였습니다.

이이는 정여립을 한없이 품어 주었지만 다른 많은 이들은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정여립이 갖고 있던 파격적인 생각들, 도대체 어떠한 내용이었을까요?


"천하는 공물(공공의 물건)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리오. 중국의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은 왕의 자리를 서로에게 전하였다. 이들이 바로 성인이 아닌가?"

"누구를 섬기든 왕이 아니겠는가? 누구를 부린 들 백성이 아니겠는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 조선은 혈연을 바탕으로 왕위를 승계하는 '왕조' 국가였습니다. 바로 그 조선에서 일개 선비에 불과한 정여립이 왕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오해받을 법한 말들을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정여립은 중국의 전설적인 임금으로 칭송받는 요, 순, 우 임금은 자신의 아들들이 아니라 당시 능력 있다고 평가받는 서로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무조건 혈족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조선의 시스템을 돌려 비판한 것입니다. 한편, 왕과 신하의 관계에 대한 생각도 남달랐습니다. 신하가 왕에게 무조건적으로 충을 보여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게 정여립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여립의 생각이 선조의 귀에 들어간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선조는 정여립의 불손한 생각을 알기 전에도 그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던 듯합니다. 이이가 정여립을 추천하였을 때도 별로 탐탁지 않아 했죠. 이후 정여립이 벼슬 생활을 시작한 지 15년 차가 된 1584년에 그를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왔습니다. 정여립이 그의 스승인 율곡 이이를 비방하였다는 이유였습니다. 선조는 진노했습니다. 정여립은 자신이 임금의 눈 밖에 났다는 사실을 감지하고는 별 미련 없이 벼슬을 내려놓고 김제로 내려갔습니다.


F/T 자신만의 작은 세상, 대동계를 열다

김제 금산사(출처: 문화재청)

정여립은 김제 모악산의 지맥인 제비산 앞에 터를 잡았습니다. 미륵신앙의 본거지로 유명한 금산사가 그 근처에 있었죠. 정여립이 김제로 왔다는 소식을 듣고 멀리서 많은 선비가 연일 그를 찾았습니다. 정여립은 곧 김제와 가까운 진안 죽도로 다시 거처를 옮겼습니다. 섬인 듯하면서도 섬이 아닌 독특한 지형이 당시 성리학의 이단아로 평가받던 그의 마음에 쏙 들어왔던 것일까요.  

정여립은 죽도 서당을 지은 뒤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습니다. 특이한 건 학문만 강론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곧  600여 명 정도의 규모인 '대동계'라는 무인 단체를 결성합니다. '대동'은 유교 경전인 예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대동이란 쉽게 말해 "온 천하를 공공의 것으로 여기는 세상"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정여립은 그 뜻에 맞게 신분에 관계없이 천민들도 대동계로 들였습니다. 대동계 안에서 천민들은 지위도, 신분도 잊은 채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대동계는 매월 15일에 모여 활쏘기 대회를 열었습니다. 곧 대동계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러던 중 1587년 전라남도 여수에 위치한 손죽도에 왜구가 출몰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급박하던 그 때, 당시 전주의 지방관이었던 남언경이 정여립에게 대동계의 군사들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죠. 날마다 무예를 익히던 대동계는 왜구를 멋지게 소탕해 냈습니다.


P/J 희대의 반역자로 기억되다

그런데 정여립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지켜보던 이들은 이를 빌미로 삼았습니다. 1589년, 정여립이 반란을 준비하고 있다는 상소가 선조에게 전해집니다. 당시에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이 하루가 다르게 퍼지고 있었습니다. 일본이 조선을 쳐들어 올 때, 정여립이 그 틈을 타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선조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습니다. 결국 39세 정여립의 대동을 향한 꿈은 그렇게 꺾이고 말았습니다. 하루아침에 정여립은 진안 죽도의 이슬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진안 죽도(출처: 전북특별자치도 이미지 갤러리)

오늘날 학계에서는 '정여립 반란 사건'의 진위 여부를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입니다. 정여립이 실제로 반역을 꾀하였느냐, 그렇지 않았느냐를 두고 많은 의견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수세에 몰리고 있던 서인이 동인을 정계에서 몰아내고자 정여립을 무고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서인과 동인으로 나누어진 정국을 이리저리 저울질하며 이끌어 나가던 선조의 정치적 계산이었다고도 이야기합니다.

정여립이 진안 죽도의 이슬로 사라지고 400여 년이 흐른 지금, 진실을 알 길은 없습니다. 그저 우리에게 남은 건 400여 년 전 조선에서 난 선비 정여립이 왕조를 부정하였다는 사실과 용서받지 못할 사상을 가진 정여립이 희대의 반역자로 조선 시대 내내 기억되어 왔다는 사실뿐입니다. 생과 사의 경계에 선 그 찰나에, 과연 정여립은 어떠한 생각으로 스스로의 종말을 받아들였을까요.


지금까지 진안 죽도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짧게나마 정여립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박학다식하여 어딜 가든 주위에 사람이 몰렸던 정여립(E), 현실과는 동떨어진 혁신적인 생각으로 주변을 깜짝 놀라게 하던 정여립(N), 대동계를 조직하여 세상에서 가장 낮은 처우를 받던 천인들을 끌어안았던 정여립(F), 자신만의 작은 세상으로 새로운 날들을 꿈꾸었지만 결국 희대의 반역자로 몰려 엄벌을 받게 된 정여립(J).


이러한 사실들을 미루어 보아 정여립의 MBTI는 엔프제(ENFJ)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어디까지나 재미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작은 소감을 적어 주신 댓글들은 늘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자산어보는 정여립과는 관련이 없는 영화입니다.

다만, 분위기가 어울려 가져왔습니다.

영화 속 정약전이 창대를 보고 "주자는 힘이 세구나." 한탄하던 장면이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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