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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Jan 23. 2024

9. 조선의 INFP(율곡 이이)

푸른 용이 낳은 신동

파주 율곡 3리에는 임진강을 품고 있는 정자, 화석정이 있습니다.  아찔한 벼랑에 자리한 화석정은 입이 떡 벌어질 만큼의 절경을 자랑합니다.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푸른 산의 능선 아래로 임진강이 굽어 흐르는 호젓한 풍광을 이이도 참 좋아했습니다. 병치레가 잦았던 그는 자주 벼슬을 내려놓고 화석정에서 머물곤 했다고 합니다.


파주 율곡리의 화석정(출처: 문화재청)

파주 율곡리는 이이 아버지의 고향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파주에서 공부를 시작한 이이는 율곡리에 특별히 정을 붙인 것 같습니다. 이이의 호 '율곡'도 바로 이 율곡리에서 따 왔을 정도였으니까요.

화석정과 얽힌 재미난 일화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 선조가 한창 북쪽으로 피난길을 떠날 때였습니다. 화석정 근처로 온 선조는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시야가 어두워 임진강을 건널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죠. 그러다 갑자기 주위가 환해졌습니다. 선조를 모시던 이항복이 화석정에 불을 놓았던 것입니다. 이항복은 이이를 깊이 존경하던 인물이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세상을 떠난 이이가 평소 화석정을 아끼던 사실을 알았던 걸까요. 평소 이이가 화석정 기둥에 기름칠을 해 두었기에 선조가 무사히 강을 건널 때까지 화석정의 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E/I 푸른 용의 기를 타고 난 신동

그런데 이이가 태어난 곳은 파주 율곡리가 아닌 강원도 강릉이었습니다. 강릉은 어머니의 친정이었죠. 조선 전기에는 남편이 처가에서 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강릉 오죽헌에는 이이를 낳기 전 어머니가 바다에서 푸른 용이 날아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는 몽룡실이 남아 있습니다.

강릉 오죽헌(출처: 문화재청)
오죽헌의 몽룡실(출처: 문화재청)

이이는 어려서부터 유독 총명했습니다. 세 살 때 문자를 깨치고 여덟 살 때는 파주 화석정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를 지을 정도였습니다. 이이는 어머니 신씨에게 글을 배웠습니다. 신씨는 고금의 책을 두루 읽어 글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그림도 참 잘 그렸습니다. 그림에 얼마나 소질이 있었는지 생전에 산수도를 잘 그리는 화가로서 명성이 자자할 정도였죠. 이쯤에서 눈치채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이의 어머니 신씨는 오만 원권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한 신사임당이었습니다.

글과 그림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슬하에서 글을 배운 이이는 어떠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까요? 분명한 건 어머니를 유달리 따랐다는 점입니다.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벼슬하며 머물던 한양으로 거처를 옮긴 이이는 열세 살 때 그 어렵다던 과거 문과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국가고시에 최연소로 1등의 성적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죠. 그 뒤로 29세까지 총 9번의 과거를 치른 이이는 모든 시험에서 장원급제하여 '구도 장원공'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탄탄한 앞길을 자랑하던 이이를 막아선 건 어머니의 죽음이었습니다. 이이가 16세가 되던 날 신씨는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파주에 모신 어머니의 묘를 3년이나 지켰는데도 슬픔을 이기지 못한 이이는 점차 불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생과 사를 논하는 불경의 내용이 매혹적으로 다가와 서였을까요. 19세 때는 아예 불교에 귀의하고자 첩첩산중의 금강산으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N/S 성리학의 대가 퇴계 이황과의 만남


그러던 이이가 어떤 계기로 산에서 내려왔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불경을 접은 이이는 다시 유학의 길을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결심에서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안동 도산이었습니다. 당시 도산에는 이이보다 서른다섯 살 위인 퇴계 이황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안동 도산서원 동운정사(출처: 문화재청)

이이와 이황은 성리학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정리하고 완성한 양대 산맥이었습니다. 조선이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앞 편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조선이 세워진 지 200여 년이 되어서야 성리학 연구가 궤도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리학은 사실 고려 때 처음 들어왔습니다. 당시 중국 남송의 학자 주희가 유학을 새로 해석해서 만든 핫한 신학문이었죠. 때문에 조선 전기에는 주희의 해석을 바탕에 둔 성리학을 그대로 따라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외국에서 들어와 이해하기 힘든 성리학의 체제를 마침내 조선만의 시선으로 풀어 낸 이황과 이이에게 선비들은 열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이이는 서인의, 이황은 동인의 영수로 추앙받았죠. 아차, 서인과 동인 오래 전 교과서에서 보았던 머리 아픈 개념들입니다. ‘붕당’이라는 큰 타이틀 아래 등장하는 키워드들이었는데요. 혹시 기억하고 계신가요?

시간의 태엽을 감아 다시 중종 때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중종의 총애를 받아 야심찬 개혁을 시도하다가 쫓겨난 조광조. 그가 실패한 이후로 사림 세력의 수난은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중종 다음으로 차례로 왕이 된 인종, 명종 때는 임금의 외가 가족, 즉 외척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폐단이 나타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외척 세력 간의 다툼도 잦았습니다. 결국 을사년(1545년, 명종 즉위년)에 그 여파로 사화가 다시 한번 일어나면서 사림 세력이 화를 당했습니다.

명종에 이어 선조가 왕위에 오른 다음에야 사림 세력은 안정적으로 정계에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정치 운영 방식을 두고 사림 세력 간에도 다툼이 발생했습니다. 외척과 훈구의 정치 참여를 완전히 차단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첨예한 의견 대립으로 사림 세력은 결국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습니다.  더 먼 훗날 동인과 서인은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습니다. 갈등이 극에 달했던 것이죠. 이후 각각 동인과 서인의 계보를 이은 제자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더 견고히 하고자 이황과 이이의 이름으로 정당을 브랜딩 하였습니다. 오늘날 이황과 이이는 각각 천 원권, 오천 원권의 주인공이기도 하죠.

퇴계 이황 표준영정(출처: 전통문화포털)

먼 훗날 동인과 서인의 갈등이 어떠했든 간에 이황과 이이는 학문에 대한 의견 차이가 있을지언정 서로를 결코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서로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특별한 연을 이어갔죠.

금강산에서 내려온 이이가 이황을 찾은 이유도 가르침을 구하고자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황도 학문의 도를 알고자 먼 길을 찾아온 이이의 사람됨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제자 조목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이는 사람됨이 밝고 시원스러울 뿐 아니라 학문에도 깊은 뜻이 있다"라고 적었죠. 훗날 이이에게 직접 보낸 편지에서도 "불교에 중독되었다 하여 애석하게 여겼는데 전에 만났을 때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다 이야기했으니 함께 도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며 한때의 방황을 눈감아 주고 격려했습니다.

이이도 그런 이황에게 깊은 존경을 표했습니다.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그를 진심으로 추모하는 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벼슬에서 물러나 도산에서 제자를 키우고 날로 학문 연구에 매진한 이황을 기리는 내용이었습니다. 일이 바빠 자신의 아우를 대신 보내 조문하게 하면서는 "마음에 기약한 일이 뜻처럼 되지 않아 달려 가 곡하지도 못하였습니다."는 애절한 심정을 전했죠.


F/T 병든 사회를 위한 개혁


짧은 방황을 끝내고 이이가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나아간 건 마지막 과거 시험을 치른 29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나라의 경제를 운영하는 호조와 외교를 주관하는 예조를 거쳐 임금과 관리의 잘못을 바로잡는 사간원에 몸을 담았습니다. 명종실록에서는 사간원 정언으로서 탄탄한 이력을 시작한 이이를 "나이 일곱에 읽지 않은 책이 없는 신동이었으며 성품이 순수하고 총명하였다"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이이는 무엇보다 사회 개혁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이의 업적을 찾아보면 성리학과 함께 '경장(更張)'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따라붙을 정도입니다. 경장의 말 뜻을 풀면 '거문고의 줄이 느슨해졌을 때 줄을 다시 팽팽하게 당겨 소리를 바로잡아야 한다'입니다. 이이는 당시 조선 사회가 '느슨한 줄'과 같다고 생각한 것이죠. 새나라를 세운 지도 어느덧 200여 년, 사회는 병을 얻게 되었고 다시 초심을 찾아가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연산군의 폭정을 지나 중종 때 한차례 개혁에 실패하고 명종 때 이르러서는 외척의 손에 정치가 좌지우지되고 말았습니다. 이이가 보기에 개혁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습니다. 이이는 선조에게 여러 번 글을 올려 자신이 생각하는 개혁안 여럿을 내놓습니다.

이이의 유묵(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첫째, 중종 때 아무 공도 없이 공신이 된 신하들을 찾아 공신 목록에서 삭제해야 한다. 조광조가 중종에게 주장한 '위훈 삭제', 기억나시나요? 선조는 중종반정의 당사자가 아니었습니다. 중종에게 버림받은 조광조의 의지가 시간의 은혜를 입어 이이에게 고스란히 이어진 것이죠.

둘째, 세금 제도를 고쳐야 한다. 그중에서도 이이가 주장한 '대공수미법'은 이이가 죽은 후 100여 년이 지나서야  '대동법'이라는 이름으로 실시되었습니다. 그만큼 효과가 분명한 실질적인 개혁안이었던 것이죠.  

조선의 백성들은 각 지방에서 나는 특산물을 일정량 세금으로 바쳐야 했는데요. 흉년이 들면 사정이 좋지 않아 그 할당량을 채우기가 몹시 힘들었습니다. 일부 관리들은 대신 세금을 내주고 백성에게 원가보다 훨씬 더 높은 대가를 거두었죠.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 이이는 백성이 특산물 대신 쌀로 세금을 납부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거둘 수, 쌀 미, '수미법'입니다.  

셋째, 십만의 병력을 길러야 한다. 이이는 조선의 북쪽에서 날로 기회를 엿보고 있는 여진족을 염려하며 군대를 키워 조선의 국방을 다시금 정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세워진 이후로 좀처럼 큰 전쟁을 겪지 않은 조선은 국방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았죠. 당시 가장 문제가 된 건 '대립'이었습니다. 양반은 군대에 가지 않는 데다가 농사로 생계가 바쁜 농민들도 날이 갈수록 군대를 기피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신 대, 설 립, 남이 대신 군대의 의무를 지는  '대립'이 성행했던 것입니다.

영화 대립군의 한 장면(출처: 네이버 영화)

그러나 늘 그렇듯 많은 개혁이 한꺼번에 실현되기는 참 어렵습니다. 선조는 이이의 말에 '마치 성현의 뜻과 같다'라고 수긍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동인과 서인의 대립이 점차 심해지고 있었기에 한마음 한뜻으로 개혁안을 추진해 나가기가 쉽지 않았죠.

이이는 동인과 서인의 주장 모두 이치에 맞는 게 있고, 틀린 게 있다며 붕당에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하고 개혁에 힘쓰자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정부의 분위기는 냉각되어만 갔습니다.


P/J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맞이한 이른 죽음

 

쉽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항상 고심한 탓이었을까요. 이이는 관직 생활 내내 건강이 좋지 못했습니다. 선조는 이이를 요직에 붙잡아 두고자 했고 이이는 계속해서 사직을 요청했습니다. "학문이 부족하다"는 게 표면상 내세운 이유였죠. 당시 이이의 솔직한 속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실록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이이는 선비들을 중재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사심 없이 할 말을 다하다가 주위 사람들에게 꺼리는 대상이 되었다. 마침내 당인들의 원수가 되어 큰 화를 면치 못할 뻔하였다. 인물을 논하고 추천할 때는  반드시 학문, 명망, 품행을 중요하게 여겼다. 진실되지 못하고 빌붙으려는 자들에게 자주 배반을 당하였다. 세속의 여론은 이이를 현실에 어둡다고 이야기하였다.
- 선조실록 선조 17년 1월 1일


서로를 속고 속일 수밖에 없는 현실 정치에 이이는 아마 이골이 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세상에 한없이 닳고 닳은 이이는 앞서 소개한 파주 율곡리로 내려 가 제자를 가르치며 가족과 화목하게 살 꿈을 꾸기도 하였죠. 그러나 정부는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이이는 몇 번을 사양하면서도 결국 몇 차례 더 벼슬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인상적인 건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주장한 개혁안들이 국방과 관계된 내용이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소개해 드린 10만의 군대를 키워야 한다는 주장을 포함하여 북방을 점검하러 길을 떠나는 서익에게 '여섯 가지 방어책'을 손수 이야기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군대를 키워야 한다는 이이의 주장은 류성룡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때 오늘날의 국무총리, 즉 영의정의 자리를 역임했던 인물입니다. 이순신을 수군을 이끌 대장으로 추천한 장본인이기도 했죠. 류성룡은 "당시에는 백성에게 소란을 줄까 두려워 반대했는데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이이는 참으로 성인이었다." 후회하고 또 후회했습니다.

율곡 이이 표준영정(출처: 전통문화포털)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날 당시의 나이보다 한 살 많은 49세 때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고는 신사임당의 묘가 있는 파주에 안장되었죠. 병든 사회를 고쳐보고자 했던 이이의 꿈은 미완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먼 훗날 이이는 "학문에 널리 통하고 백성평안을 살펴 정치의 근본을 세웠다"는 뜻에서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받아 많은 이들에게 널리 기억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화석정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짧게나마 율곡 이이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이곳저곳을 떠돌며 늘 책 속에서 답을 찾고자 한 이이(I), 불교와 유교를 넘나 들며 학문 속에서 개인의 삶, 나아가 세상만사를 헤아려 보고자 했던 이이(N),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던 사림 세력을 어떻게든 화합시키고자 했던 이이(F), 병든 사회를 고치기 위해 여러 개혁을 분명하게 주장하면서도 시세의 흐름에 맞추어 나가고자 했던 이이(P).


이러한 사실들을 미루어 보아 율곡 이이의 MBTI는 인프피(INFP)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어디까지나 재미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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