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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Jan 22. 2024

몇 백 년도 더 된 이야기를 하는 이유

MBTI로 보는 조선왕조 500년 비하인드

수능을 앞둔 고3의 시절, 그때는 무얼 하든 마음이 묵직한 죄책감이 드는 나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시라도 공부에서 눈을 떼고 있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이 스스로를 들들 볶았었죠. 누가 시키지도 않은 품이 많이 드는 글을 쓰는 요즘, 그때 보다도 더 큰 불안이 마음을 온통 삼켜버린 것 같아요. 일주일에 역사 인물 한 명씩 MBTI를 밝히는 글을 쓰기 위해 논문 대여섯 편을 읽습니다. 몇 백 년도 더 된 인물들의 삶을 나만의 시선으로 복원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타고난 역덕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포기했을 거예요. 그럼에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역사 인물 MBTI를 밝히는 글을 쓰고 싶다, 오래도록 혼자만 품고 있었던 포부였습니다. 어느 날 지도 교수님을 만나서 당당히 그 포부를 밝혔습니다. 치기 어린 제자의 들뜬 설명을 듣던 교수님은 그래, 해 봐라 하며 귀엽다, 봐주신 것 같아요. 

어느 날 교수님과 함께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선배가 제안을 해 왔습니다. 너의 이름으로 출판물을 내줘 볼 테니 함께 한국사, 세계사 인물들의 MBTI를 밝히는 콘텐츠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죠. 솔깃했습니다. 선뜻하겠다고 나섰지만 그 뒤로 내심 깊이 고민했습니다. 그때 저는 출판 쪽에 몸을 담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시점이었습니다. 선배가 일하는 곳은 엄밀히 이야기하면 제가 몸을 담고 있는 회사의 경쟁사였죠. 긴 시간 고민하다가 결국 참여하지 않겠다, 뜻을 밝혔습니다. 도저히 양심이 허락하지를 않아서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선배가 기획한 출판물 발간 예정 소식이 제 귀에까지 들어왔습니다. 땅을 치고 후회해 봤자 이미 엎어진 물이었습니다. 이미 세상에는 MBTI를 소재로 한 콘텐츠는 넘쳐 나고 있었기에 원래 내 아이디어였다, 억울함을 토해 봐도 우스운 꼴이긴 했습니다. 그런데도 배가 아프더라고요. 제 발로 찬 기회지만 일이 참 요상하게 돌아갔다는 이상한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참 얄궂게도, 그 분한 마음이 오랜 시간 꿈쩍 않던 제 몸을 움직였습니다. 더 늦다가는 더 억울해질 것만 같아서였어요. 전공이기도 하고, 좋아라 하기도 하는 조선을 특정해서 써 보자,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길고 긴 여정에 제 자신을 밀어 넣어 버렸죠. 


한 인물, 한 인물 글을 쓸 때마다 참 놀랐습니다. 어디서 역사를 전공하였다고 이야기하기에도 부끄러울 정도였습니다. 익히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 인물들의 삶을 이토록 모르고 있었다니, 쓸수록 되려 스스로가 배우는 게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버거웠습니다. 논문도 써 보고, 칼럼도 써 보고, 전시 패널도 써 보고, 역사 교과서도 개발을 해 보았기에, 슥슥- 쉽게 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쓸수록 욕심이 불어났습니다. 허무맹랑한 "썰"들을 들고 와 왜곡의 소지가 다분한 글을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써 가는 인물이 늘어날수록 저도 모르게 분량이 계속해서 늘어나는 것도 같아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새하얀 빈종이를 마주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참 가슴이 답답합니다. 이번에도 해낼 수 있을까, 마무리할 수 있을까 저 자신을 의심하죠. 


그러나 앉아서 결국 꾸역꾸역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립니다. 그렇게 몇 백 년도 전의 인물들을 버겁게, 벅차게, 힘들게 만나 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순신을 마지막으로 8명을 만났습니다. 아무리 레트로가 유행이라지만 먼 옛날 낡고 낡은 생의 이야기들에 관심을 가져 주실까, 욕심을 부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몇몇 분들이 써 주시는 응원의 댓글들을 보며, 또 브런치를 안 하는 주변 분들의 힘찬 격려의 말을 들으며 오늘도 힘겹게 자리에 앉았습니다. 


알고 보면 오늘날의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먼 옛날 타인의 생을 통해 많은 분들이 소소한 위로와 용기를 얻어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그러는 것처럼요. 



한남동 아키비스트에서 이순신의 MBTI를 한참 고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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