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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Sep 09. 2024

서른둘, 세 개의 이력

박물관을 다시 그만 둔 이유

석사 과정을 졸업한 후 처음 직장에 들어 가 월급을 받았을 때 통장에 찍힌 숫자는 168. 그때는 이 돈이 그렇게 적은지 몰랐다. 무급으로 밤샘 야간조 공부를 끊임없이 해 온 궁둥이 이력은 그만큼 스스로를 한없이 낮춰 주었다. 방 한 칸에 내가 앉을 책상 하나만 있어도 여생이 행복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순수한 나날들. 좋아하는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걸로 되었다고, 그렇게 단출한 숫자를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때 묻지 않은 해맑은 마음은 얼마 가지 못했다. 인문학을 전공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부딪혔던 무수한 걱정들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호기롭게 선택한 길이었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지 못했다. 공무원인 줄 알았던 박물관 공무직은 ‘무기계약직’의 허울 좋은 이름이었고, 이 때문에 재직한 지 3년이 넘어 가는데도 168의 앞자리 숫자는 여전히 ‘1’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부모님 집에 얹혀살 때는 그나마 사정이 나았는데, 무슨 배짱이었는지 서울에 월세를 구해 독립한 후로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생활비에 늘 허덕여야 했다. 


그런 와중에 유망하지 않은 인문학 전공자의 현실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수 있는 부유한 동료들의 사정이 눈에 들어오면서 더욱 힘들어졌다. 월급 앞자리가 3이 넘는 직원의 비율이 10%도 되지 않는 곳이라는 사실이 무색하게, 주차장에는 외제차들이 즐비했다. 세계 곳곳의 차를 타는 그들은 여가 시간이 주어지면 어느 명품을 얼마에 샀노라는 둥 미처 낄 수 없는 한담을 줄곧 이어 갔다. 주 5일 출근 중에 한 번도 같은 옷을 입는 법이 없었던 동료들의 틈바구니 안에서 기죽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저축은 고사하고 월급의 4할 이상이 쇼핑비로 나가기 일쑤였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다리가 찢어진다는 게 이런 말인가 보다, 하며 자조했지만 비교의 늪에서 벗어나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일이 참 재미있었다. 통장에 찍히는 숫자와 무관하게, 스스로 부족하다 여겨지면 해가 떨어진 지 한참 뒤에서야 사무실에서 나오곤 했다. 긴 시간 뜸을 들인 고민과 사유를 유물이라는 오래된 실체에 덧대어 새로운 이야기로 풀어내는 이 일이 천성에 딱 맞았다. 어쩔 때는 그 천성이 저주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하루하루 충만하게 살아 냈으니 되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렇게 나름 자족하던 그곳을 뛰쳐나온 이유는 돈이 아닌 사람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재직한 지 10년이 다 되어 가는 ‘정규직’ 과장이었다. 과장은 무턱대고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내 성미를 참 부담스러워했다. 어떤 날은 진지하게 날 붙들고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며 진심 어린 충고를 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그의 말도 맞았다.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비영리기관에서 끝도 없이 삽질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으니까. 대단한 성과를 낸다고 해도 만년 공무직일 뿐이라, 노고에 상응하는 페이를 받을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럼에도 타고난 성미를 내려놓지 못했고, 결국 나의 과도한 열정은 과장의 자존심에 꽤나 큰 스크래치를 남겼다. 그 후로 과장은 함께 있을 때면 눈에 띄게 날 피하거나 무시했고, 때로는 그런 그의 행동이 업무에 큰 지장을 주기도 했다. 나보다 월급을 곱절로 받는 과장의 미숙한 행동에 그러려니 하다가도, 가끔은 머리에 불을 댄 것만 같이 억누를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 펑 터져 버린 건, 나의 역할이 적어도 8할 이상은 되었던 도록의 기획 부문에 공무직이라는 이유만으로 내 이름 석자를 올리지 못했을 때였다. 


정규직에 지원을 안 해 본 것도 아니었다. 다대다 면접이었기에 같은 현장에서 모든 지원자들의 PR을 여과 없이 다 들으며 어느 정도 결과를 예상해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결국 무참히 떨어지고 말았을 때는 자괴감이 물밑 듯이 밀려왔다. 이후 카더라통신으로 들으니 나 대신 그 자리에 턱 붙은 인사는 누구누구의 인맥이라고 했다.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업무에 자율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없는 자리에서는 자신을 어느 정도 쏟아붓지 않는 것도 지혜로운 것이라는, 쓰디쓴 교훈을 안고 첫 직장을 떠났다. 


3번의 면접을 거쳐 이직한 곳은 교육계 기업의 역사 교과서를 기획하고 개발하는 부서였다. 경력직 ‘정규직’으로 입사했지만 편집자의 길을 진정으로 원했던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은 상태였던 터라 좀 떨떠름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새로운 직장의 환경이 너무나 좋았다. 규모가 큰 만큼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었고, 공공기관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상식 밖의 상황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더군다나 사수가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일에 전념하는 타입이었던 엄격한 관리자 유형의 ESTJ 사수에게서는 배울 게 산더미였다. 새로운 일에 적응하는 데 버퍼링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에 하루하루가 알차고 뿌듯했다. 엄격한 일정에 맞춰 체계적으로 일이 딱딱 진행되는 것도 천성에 딱 맞았다. 꾸준히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1년 반이 지나 있었고, 그동안의 성과를 인정받아 승진도 했다. 통장에 찍힌 앞자리 숫자 ‘3’이 그렇게 경이로울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이 업계에서의 성공은 따놓은 당상과도 같다는 그런 오만한 생각도 훅 스쳤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헐거웠다. 내가 만든 콘텐츠를 앞에 두고도 그 콘텐츠의 주인일 수 없다는 뼈 아픈 사실 때문이었다. 애초에 편집자라는 업 자체를 두고 고민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어렵게 만든 콘텐츠가 마침내 세상의 빛을 보았을 때, 편집자의 이름은 저자의 위용에 가려져 제 자취를 꽁꽁 감추었다. 물론 콘텐츠를 만드는 데 기본 소스라고 할 수 있는 ‘원고’를 제공하는 건 저자였다. 그러나 저자가 준 원고는 글밥에 지나지 않았다. 그 글밥은 열댓 번이 넘는 교정을 거친 후에는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어렵게 바뀌어 있었다. 이 밖에도 글 옆에 배치하는 그림이나 사진, 지도나 그래프 등을 발주하고 지면 위에 알맞게 배치하는 일도 편집자의 몫이었다. 


편집자의 딜레마는 세상에 무수히 존재하는 티끌처럼 누구나의 현실일 뿐이라며, 이해하고 덮어 보고자 했다. 그렇게 자신을 속이고 앞자리 ‘3’의 달콤함 속에 안일하게 안주하고 싶었다. 그런데도 콘텐츠의 주인으로 우뚝 서고 싶다는 갈급한 욕망은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교과서 개발 막바지에 이르러 연일 야근을 하는 중에도 틈틈이 짬을 내어 나만의 글을 써온 고집도 이러한 순진한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던 중 평소 동경하던 박물관에 TO가 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계약직 신분이었지만, '공무직' 연구원이 아닌 ‘학예사’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심지어 박물관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콘텐츠는 내 전공 주제와 찰떡처럼 맞아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연봉은 ‘박’이 ‘박봉 박’ 자가 아니냐는 타당한 의심이 난무하는 박물관답게, 지금보다 현저히 낮았다. 잠시나마 조우했던 앞자리 3은 그렇게 안녕을 고했다. 현실적인 누군가는 이때 내린 나의 결정을 두고 욕지기를 뱉을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다시 현실은 나의 눈먼 결핍 앞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그러나 오랜 숙원이었던 학예사의 길은 예상처럼 순탄치 못했다. 입사 첫날 낯빛이 유난히 어두웠던 연구원은 곧 있을 자신의 퇴사 소식을 전하며 이런저런 일을 재빠르게 가르쳐 주었다. 쎄함을 느낄 새도 없이 이런저런 잔무가 파도가 덮치듯 밀려들었다. 입사 직후 처음 맡게 된 일은 전시 패널 작성이었는데, 놀라운 사실은 그때가 전시 개막이 코앞인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이미 마무리가 되어 있어야 할 일들이 제 주인을 잃은 채 산재해 있는 걸 보며 그대로 넋다운이 되었다. 그 좋은 일자리를 팽개치고 오더니 꼴좋다, 정신없이 일 처리를 하느라 여념이 없는 와중에도 내 머릿속의 불안등은 미친 듯이 깜빡이고 있었다. 


어른은 제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법, 출근 때마다 또 퇴근 때마다 마음을 다잡았지만 쉽진 않았다. 땡볕에 노랗게 시들어가는 저 들의 마른 잡초처럼, 하루하루 마음이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안 좋은 소식은 끊이질 않았다. 내가 온 뒤 그만둔 연구원 말고도 올해 퇴사자는 무려 세 명이었으며, 박물관 개관 이래 학예실 인력은 매해 바뀌어 왔다는 사실을, 오래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넓디넓은 박물관을 단 5명의 학예실 직원이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놀랄 노 자였는데, 더 놀라운 소식에 절로 입을 꾹 닫게 되었다.


두서없이 일이 많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체계가 없어 모든 일이 분장되지 못한 채 뒤죽박죽인 건 이미 이전 직장에서 숱하게 경험에 온 사실이라 꽤나 자신이 있었다. 사내 메신저 없이 모든 업무를 카톡으로 처리해도, 결재 시스템이 없어 수기로 사인을 받아도, 전에 없던 새로운 경험이라며 스스로를 애써 타이를 수 있었다. 어느 무더운 날 우체국에서 홀로 우편 스티커 몇 백장을 붙이면서도, 머리를 쓰지 않는 일을 하니 좋지 아니한가 하며 허허 웃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정신 승리는 학예사라는 직함에 걸었던 나의 기대가 여지없이 모두 무너지면서 결국 끝이 나고 말았다. 관장의 모든 말이 ‘비비디바비디부’가 되는 곳에서 학예사가 콘텐츠 전문가로서 설 곳은 단 1평도 없었다. 유물들은 수장고에 앉아 먼지만을 뽀얗게 안은 채 세상 속에서 조용히 잊혀지고 있었다. 그저 존재만이라도 하면 다행이건만, 제대로 관리도 되지 않고 있어 그 운명이 심히 걱정될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날은 815 광복절이었다. 피부로 맞닿아 있는 처참한 상황이 너무도 생생한데, 상기된 투로 광복절의 이모저모를 보도하는 매스컴들이 참 생경했다.  


그보다 더 참을 수 없었던 건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사람들의 말말말이었다. 이런 말, 저런 말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창의력이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무수한 말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나조차도 그 말을 양산해 내는 일원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때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그렇게 결국 세 번째 직장을 떠났다. 



마지막 근무를 하고 온 날 피곤한 몸을 누이고 찬찬히 돌아보니 좋았든 좋지 않았든 결국 모두 내 욕심이었구나, 싶은 멋쩍은 생각이 들었다. 서른둘에 세 개의 이력, 고작 5년 남짓한 시간이었다. 앞으로 남은 긴긴 인생을 덧대 보면 찰나의 순간과도 같은 날들일 테다. 너른 세상 속에서 잠시 머물다 갈 미물에 지나지 않은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세상을 제 뜻대로 부리고 싶어 유난히도 애를 썼구나 싶었다. 


계속해서 힘을 꼬옥 주기만 해서 모두 부러지기만 했나 보다, 쓸쓸하고 허망한 생각도 들었다. 앞으로 펼쳐질 예상할 수 없는 미래에 다시금 불안이 고개를 번쩍 들기도 했다.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였지만 결국 이제는 잠시 놓아주자,라는 천하 태평한 결론에 이르렀다. 이래도 저래도 내 맘처럼 되지 않을 세상에 애써, 또 힘써 실망하지 말기로 한 것이다. 


이 너른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스스로를 믿어 줄 존재가 스스로 뿐이라면, 자신이 허락한, 자신만이 허락할 수 있는 일말의 시간 속에서 서서히 유영해 보자고 다독였다. 그렇게 숱한 시간을 딛고 일어선 서른둘의 밤은 또 다른 시작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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