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의 MBTI는 무엇일까?
조선 시대 희대의 폭군 연산군, 그를 그리는 드라마나 영화는 무척 많습니다. 배우 이준기가 화려하게 데뷔한 영화 '왕의 남자'가 그 대표적인 예이지요. 다소 엽기적이었다고까지 할 수 있는 그의 광기 어린 폭정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다 혀를 내두룹니다. 성종의 적장자로 누구보다 고귀하게 태어났지만, 조선의 왕이라면 누구나 받는 '조'나 '종'이 아닌 '군'의 묘호를 처음으로 받게 된 연산군, 그에게는 어떠한 사연이 숨어 있는 걸까요?
연산군이 아버지 성종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 자료에서 확인됩니다. 연산군은 성종이 세운 옛 법을 모두 폐지하는가 하면, 성종에게 제사 지내는 사람들을 처벌했습니다. 나아가 성종의 기일에 사냥을 가거나 성종의 무덤인 선릉에서 연회를 베풀기도 했지요. 이뿐 아니라 성종의 초상화인 영정을 향해 화살을 쏘거나 손으로 걷어 때리고, 성종의 후궁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기이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연산군의 행동은 '효도'를 강조하는 유학의 나라 조선에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연산군은 아버지를 왜 이렇게까지 미워했던 걸까요?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세자가 놀다가 저녁이 되어 궁으로 돌아오자 성종이 "오늘 거리에 나가 놀 때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물으니, 세자는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 소를 따라가는데, 어미 소가 소리를 내면 송아지도 소리를 내며 응하였습니다. 어미와 새끼가 함께 살아 있으니 부러웠습니다."하였다. 이를 들은 성종은 매우 슬퍼하였다.
-연려실기술
연산군은 아주 어린 시절에 친어머니 윤씨를 잃었습니다. 윤씨는 처음 중전이 되었을 때 매우 총명하고 슬기로운 면모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남편 성종의 행보에 지나친 질투에 시기를 보였고, 어느 날에는 성종의 얼굴에 상처를 내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윤씨는 중전의 자리에서 쫓겨나 결국 성종이 내린 사약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윤씨가 세상을 떠날 때 연산군은 7살의 앳된 아이였습니다. 3살에 어머니와 헤어진 연산군은 어머니가 아버지의 변심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좋지 않은 일이었으니 궁 안 사람들도 어린 세자에게 윤씨의 일에 대해서는 쉬쉬했을 겁니다. 그러나 세상에 끝까지 숨길 수 있는 비밀은 없는 법, 어느덧 장성하여 아버지의 왕위를 물려받은 연산군은 아버지의 묘비명을 살펴보다가 어머니와 관련된 내용을 발견하고야 맙니다. 큰 충격을 받은 연산군은 그 날 밥상마저 물렸습니다.
성종의 첫째 아들로 떳떳하게 왕위에 오른 연산군과 달리, 성종은 세조 시절부터 막강한 권력을 누려 온 장인 한명회의 입김으로 갑작스레 왕좌에 앉았습니다. 계보로 따지면 성종은 일찍 세상을 떠난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로, 왕위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지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성종은 장인 한명회를 비롯한 세조 시절의 권신들에게 이리 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친히 정치를 돌보기 시작한 성종은 새로운 세력을 끌어들여 권신들을 저지하고자 합니다. 사극을 보다 보면, "전하 아니되옵니다!"라며 바른말만 외치는 신하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이들은 조선의 3사의 신하들이었습니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으로 이루어진 3사는 오늘날 언론이 수행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성종은 먼 옛날 조선의 건국을 반대하며 지방으로 내려 간 고려 말 신하들의 제자들을 주목했습니다. 그러고는 이들을 적극 3사에 등용하기 시작하지요. 새로운 세력을 3사에 굳건히 세우고, 권신들의 부정과 비리를 감시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연산군은 세자 시절부터 3사를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 무리로 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을 비판하는 3사의 행보에 늘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죠. 왕위에 오른 뒤에도 연산군의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문서나 담당하는 관리이다.", "주인이 이렇게 하겠다고 하는데, 종이 불가하다고 맞서면 안된다."라며 거칠게 꾸중할 정도였습니다.
불안한 긴장감이 이어지던 중에 결국 일이 터지고야 말았습니다.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사화'라고 부릅니다. 선비들(사)이 화를 입었다는 뜻이었지요. 이 과정에서 친어머니 윤씨를 위한 보복이라는 명분 아래 많은 신하가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두 차례의 사화가 발생한 후 연산군 앞에는 바른말을 앞세우는 신하가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왕을 "주인"으로, 신하를 "종"으로 여겼던 연산군의 본심이 마음껏 표출되기에 이르렀지요. 연산군은 그 누구에게도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누리고, 또 누리고자 했습니다.
연산군이 왕권을 드높여 이루고자했던 건 오로지 사치와 놀이뿐이었습니다. 연산군은 무리한 공사를 벌이거나 궁궐 주변의 민가를 강제로 철거하여 사냥터를 늘렸습니다. 그러고는 이곳저곳에 금표를 세워 왕의 영역을 정하고, 함부로 그 영역을 침범하는 자는 엄벌에 처했습니다. 백성들은 왕의 폭주로 하루아침에 살아갈 곳을 잃고 말았습니다.
왕이 말을 타고 마을 거리를 마구잡이로 돌아다니고자 민가를 남김없이 몰아냈다. 처녀들은 맨발로 뛰어 달아나 돌아갈 길을 잃었고, 신하들도 왕을 멀리 피하였다. - 연산군일기
기상천외한 연산군의 행동에 몇몇 신하는 목숨을 걸고 반대했습니다. 아버지 성종을 본받아 올바른 정치를 펼쳐야 한다는 조언이었습니다. 성종과 자신을 비교하는 신하들 앞에 연산군은 "자신은 아버지처럼 훌륭한 임금이 될 수 없다"며 열등감 섞인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광기서린 폭정 앞에 결국 모든 신하는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연일 연회를 열던 연산군은 그 비용을 충당하고자 백성을 가혹하게 수탈했습니다. 한 해의 세금도 버거운 백성들에게 연산군은 2년, 3년 치의 세금을 미리 거두라는 어마 무시한 명령까지 내렸습니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백성들은 "우리 임금은 신하를 파리 죽이듯 하고, 여색에 절도라고는 없다."라는 내용의 벽서를 붙이며 저항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연산군도 좋지 못하게 끝날 자신의 최후를 예견했던 모양입니다. 연산군은 혹여 자신이 왕위에서 쫓겨날까 늘 두려워했습니다. 왕을 호위하는 군사를 늘리는 한편, 궁궐의 문을 지키는 수문장에게는 사흘에 한 번 씩 상황을 보고하게 했지요. 나아가 신하들과 상인들의 행적을 감시하고 단속했습니다.
이윽고, 연산군이 두려워한 대로 결국 반정이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군사가 궁궐로 몰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연산군은 활과 화살을 가져오라 명했지만, 이미 그의 옆에 남은 이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붉은 옷에 허리띠를 두른 채 도망가던 연산군은 결국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새로 왕위에 오르게 된 중종 앞에서 연산군은 "내가 큰 죄를 지었는데도 특별히 은혜를 입어 죽지 않았습니다."라며 마지막 말을 남겼지요.
연산군이 귀양길에 올랐을 때 백성은 앞다투어 나와 손가락질하며 통쾌하게 여겼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연산군은 좁고 긴 울타리로 둘러싸여 해마저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귀양지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성종의 적장자로 누구보다 유리한 환경을 타고났지만, 어린 시절의 결핍을 이겨내지 못한 연산군의 뒤틀린 미움은 결국 누구도 아닌 스스로의 목을 조르고 말았습니다. 다년간 이어진 연산군의 폭정으로 새 왕조 조선은 때 아닌 위기를 맞게 되었지요.
소통보다는 독단적인 정치 행보를 이어 간 연산군(I), 현실에 눈을 감고 욕망과 쾌락 만을 좇은 연산군(N), 백성의 고통에 공감할 줄 몰랐던 연산군(T), 반정을 직감적으로 예상했지만 최후를 치밀하게 대비하지 못한 연산군(P).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보아 연산군의 MBTI는 INTP(인팁)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재미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요즘 뉴스 플랫폼 뉴닉에서 연재하고 있는 아티클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https://newneek.co/@shooin67/article/11574?utm_campaign=newnewcup&utm_medium=web&utm_source=article
이 글은 제 브런치북이기도 한 'MBTI로 보는 조선 사람들'의 글을 아티클 형식으로 다시 쓴 것입니다.
글의 대표 이미지는 챗GPT에게 제 글을 보내주고 이미지를 생성한 것인데
고증 면에서는 좀 문제가 많아요 ㅎㅎ(연산군을 완전 미남으로 그려 줬네요)
어디까지나 재미로 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