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이 유행인 이유?
언제부터 달리기를 시작한 건지 명확하게 떠오르진 않는다. 평소와 같이 저녁을 먹은 후 가벼운 산책을 하고 있을 때였나. 길가의 사람들 사이를 총총 잰걸음으로 누비는 사람들이 꽤나 많아졌다고 분명하게 감지하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나. 나도 이만큼만 뛰어볼까, 라는 호기심이 조금만 더, 더, 하는 욕심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집 앞을 시작으로 인근 박물관 야외 전시장을 크게 둘러 내달리는 나만의 러닝 루틴이 생겼다. 처음엔 정말이지 말로 다 표현 못할 만큼 힘이 들었다. 온 신경이 팽팽하게 곤두서서 온몸 곳곳의 근육들을 예민하게 캐치한 달까, 이런 감각도 있었나 싶을 정도의 생경한 고통. 저릿한 아픔을 잊어보려 고개를 들고 주변 풍경을 애써 샅샅이 훑어본다. 어둑어둑한 하늘 사이로 이지러지는 잎사귀들의 실루엣. 헐떡이며 한껏 들이키는 잎들의 향취가 끝장나게 달큰하다.
10분 정도가 지났을까, 그때부터는 일종의 관성이 생긴다. 둔중한 몸을 한발 한발 움직이게 하려고 용쓰던 뇌의 집요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교차하는 두발은 ‘항상적’인 상태가 된다. 반복이 선사해 준 위력에 힘입어 조금씩 여유도 부려 본다. 부러 더 먼 길로 돌아가기도 하고 오르막길도 더 빠른 페이스로 무모하게 뛰어 오른다.
들쑥날쑥한 능선을 따라 부지런히 두발을 옮기다 보면 반갑게 들려오는 음성, 어느새 2km에 도달했단다. 이쯤에서 그만할까 하던 안일한 마음을 다시 주섬주섬 구겨 넣은 채 다시 옮겨 보는 발걸음. 격자무늬가 빽빽한 바닥을 내려다보며 지금 이 순간만을 떠올리자며 간신히 스스로를 타이른다. 가야할 길을 미리 내다 보지 말자. 지금 맞닿고 있는 이 한 뼘의 바닥만, 다시 한 뼘, 또 한 뼘만.
다행히도 다시 찾아온 관성, 언제 사그라들지 모르는 축복 같은 찰나에 지친 몸을 터덜터덜 내맡긴다. 이쯤 되면 당도하게 되는 제일 좋아하는 코스. 한때 하늘과 바다를 가르며 무수한 사람을 죽였을 살상 무기들이 그 지난한 아픔의 시간을 머금고 정지해 있는 너른 공간. 거대한 무기들 틈바구니를 내달리며 저가 속해 있는 시간의 무게를 가늠해 보는 사유의 여유도 잠시 부린다.
저 멀리 푸르스름한 빛을 뿜어내는 남산타워 쪽으로 힐끗 시선을 돌리며 방향을 바꾸게 될 때면 시작되는 마지막 코스. 이제 3km. 끝은 시작 때와는 또 다른 생경한 감각으로 힘이 든다. 관성이 선사하는 항상성은 이제 영영 찾아오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엔 두발을 무겁게 당겨오는 땅의 중력과 그 힘을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는 거친 몸의 향연만이 담백하게 남아 있다. 이제껏 버텨온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도무지 멈출 수가 없다. 습습후후, 심장의 파동이 출렁이는 피부 겉면으로 고스란히 전해질 정도로 가빠진 호흡. 축축한 눈가와 인중. 달리기를 할 때면 이다지도 온몸으로 살아 있다.
이 모든 희로애락을 향유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30분. 하루의 48분의 1도 되지 못하는 이 시간 안에서 생의 기승전결이 다 녹아 있는 엑기스를 진득하게 맛본 것만 같다. 달리기라는 생의 예선을 수없이 반복하다 보면 본선도 거뜬히 잘 해낼 수 있겠지. 날마다 촘촘하게, 삶을 향해 단단한 체력을 가꿔 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