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김이 함께 무대 앞으로 가자고 했다. 따라오라고 손짓하며 그는 무수한 노인들 사이로 섞여들었다. 망설이다 그를 뒤따라갔다. 온 사방이 '타이극기'로 일렁였다. 축제를 즐기는 이들의 체온과 체취가 뒤섞였다. 미스터 김은 배낭에서 '타이극기'를 꺼내 내게 쥐여주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활기차게 흔들었다.
흔들어요. 같이 흔듭니다.
조금 민망하기도 웃기기도 했으나 나는 곧 그 상황에 적응했고 미스터 김처럼 음악에 맞추어 '타이극기'를 흔들었다. 미스터 김과 '열사'들을 핸드폰 카메라로 찍기도 했다. 미스터 김은 카메라를 보며 미소 지었고 우리 주위에 서 있는 노인들도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거나 거부감 없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내 손을 쓰다듬고 등을 토닥이며 한국어로 무어라 말하는 노인들도 있었다. 미스터김은 그들이 나를 대견해한다고 했다.
당신도 '열사'예요. 우리처럼요.
알 수 없는 고양감에 젖어들었다. 생애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다. 시끄럽고 이상하지만 뜨거운 이곳에서 나는 분명 그들과 섞이고 있었다.
- 108쪽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라는 단편 소설집 속 '스무드'라는 소설 중에서
소설 속 주인공은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외모는 영락없이 한국인이어도 한국에 대해서는 아는 게 1도 없는 미국인이죠. 그런 그가 한국으로 출장을 떠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영어가 유창한 한국 관계자들은 그의 '한국적인' 외모에 어떤 의무감이라도 느낀듯 고급 한정식 집에서 K푸드의 매력을 일깨워 주려 갖은 노력을 합니다. 노력이 무색하게 주인공은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죠.
그런 그에게 변화가 생긴건 다음날 오후가 되어서였습니다. 잘 정돈되어 있는 안락한 숙소를 뒤로한채 주인공은 마치 모험을 떠나듯 종로 이곳 저곳을 거닐어 보기로 하죠.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 배터리가 나가버립니다. 난생 처음 와 본 '이국' 땅에서 길을 잃고 만 그, 다급한 그의 시야에 들어온 건 성조기와 '타이극기'를 열심히 흔드는 시위 부대였습니다.
익숙학 성조기에 이끌려 발길을 옮겼지만, 그 무리 속에 영어가 유창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대개 노인이었던 그들은 그에게 매우 친절했죠. 그중에도 50대로 보이는 '미스터 김'은 짧은 영어로 그와 소통하며 그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분주히 노력합니다. 핸드폰을 충전해 주고, 이런저런 공짜 음식도 주었죠. 밥을 김에 싸서 손수 먹여 주기까지 합니다.
이유 없는 따뜻한 호의에 어느덧 마음을 연 주인공, '열사들의 페스티벌'이라며 시위 현장을 소개해 주는 미스터 김에게 점점 더 깊은 호감을 느낍니다. 그러고는 한껏 고조된 분위기에 흠뻑 취해 생전 느껴본 적 없었던, 마음에서부터 울컥 뜨겁게 올라오는 일종의 연대감까지 느끼죠. 성조기와 '타이극기'가 교차된 모양의 뱃지와 대통령 얼굴이 새겨진 뱃지를 기념품으로 산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면 아버지에게 오늘의 경험을 꼭 들려주리라 결심합니다. 자신의 뿌리인 한국에 대해 어떤 사연에서인지 일절 한마디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던 그 무뚝뚝한 아버지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