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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굴굴 Jan 05. 2024

상속

내가 열두 살이 되던 겨울, 할아버지는 관악산 중턱에서 돌연히 쓰러졌다. 주방과 거실을 오가며 점심 식사를 준비하던 어머니는 그 연락을 받고 돌처럼 얼어붙었다. 끓고 있는 카레를 뒤로 한 채 수화기에 대고 연신 “네?" 하며 되물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그토록 격양된 적이 없었기에, 나는 금세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 책상 위에 두 손을 모았다. 누구든 제발 도와 달라고. 따로 믿는 신은 없었지만 두려운 심정으로 초조하게 기도를 올렸다. 사실 내가 놀랐던 건 갑작스러운 부고보다도 어머니의 반응 때문이었다. 언제나 평정을 유지하던 어머니는 빈소가 차려지고 나서 몇 날 며칠을 서럽게 통곡했다. 어머니의 몸이 휘청일 때마다 나의 마음도 철렁할 수밖에.


어머니의 지갑 속에는 할아버지의 증명사진이 눈에 띄게 꽂혀 있었다. 어머니는 그걸 얼마나 아꼈는지 하루는 지갑을 분실하고 되찾기까지 몹시 애를 태웠다. 나는 그런 어머니의 사랑 혹은 설움의 정체가 늘 궁금했다. 그날 어머니는 왜 그리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나중에 전해 듣기를, 할아버지는 함경북도 칠보산에서 유년을 보내다 가난에 떠밀려 이남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일찍이 공부에 뜻을 품었고, 그 학비를 벌겠다며 직업 군인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육이오가 터지면서 귀향길이 닫히고 말았다. 국토가 동강이 났으므로, 할아버지의 세월도 반쪽짜리 토대 위에서 위태롭게 쌓여 갔다. 흔히 ‘삼팔따라지'라고 하던가. 말 그대로 혈혈단신이었다.


노년에 접어들어 웬일로 등산에 취미가 붙은 할아버지는 팔순이 다 되도록 부지런히 전국 각지의 산을 탔다. 어머니는 할아버지에 대해 쓴 글에서 이렇게 이해했다. “아버지가 고향에 돌아가면 옛날 그 칠보산 자락 다시 오르시려고 그토록 기를 쓰고 등산을 하셨던 게구나. 혹시나 기력이 쇠해 고향에 못 가실까 젊은 사람도 오르기 힘들다는 산을 숨이 차도록 오르며 체력을 비축하고 계셨던 게구나.” 아닌 게 아니라 할아버지는 생전에 저 유명한 금강산도 칠보산에 비할 바가 못 된다며 고집스레 주장을 펼쳤다고 한다. 어쩌면 마지막 순간에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관악산 중턱에서 돌연 쓰러진 할아버지. 한평생 고향 땅 다시 밟기만을 온몸으로 바랐건만 끝내 기약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그 한스러운 죽음을 두고 지난 추억을 회상하려고 보니까 막상 남은 게 많지 않다. 매주 일요일, 가족들은 택시를 타고 한강 다리를 건넜다. 시장에서 반찬거리를 사들고 굽이진 언덕을 올라 대문을 열면, 할아버지가 쇳소리로 웃고 있었다. 그 집에서 보았던 오래된 물건들이 아직 선하다. 안테나가 더듬이 마냥 솟은 티브이부터 손가락으로 다이얼을 돌리는 전화기까지. 서랍 깊숙이에는 빛바랜 훈장도 여럿 있어 어린 나에게 그런 할아버지의 존재란 꼭 박물관처럼 느껴졌다. 교과서에서나 배운 사건들을 몸소 겪은 사람. 그런데 내가 모르는 게 있었다면, 모든 역사는 박제되기보다 계속 살아 숨 쉰다는 것이다. 날카롭게 그어진 삼팔선도, 포화를 뚫고 생긴 흉터도 전부 현재였으리라.


언젠가 할아버지를 따라 효창운동장에 다녀온 적이 있다. 낮 동안 이북 오도민회 체육대회가 열렸다. 고무줄로 감긴 일회용 도시락을 받아 들고 주변을 살피니, 할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의 어르신들이 빼곡했다. 또한 각 구역에는 황해도 같은 지명이 적힌 현수막이 좌석을 안내했다. 전라도나 경상도처럼 금방이라도 닿을 수 있을 듯이. 나는 할아버지와 함께 함경북도에 앉았다. 마찬가지로 다들 자신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알고 자석처럼 이끌렸다. 그러고 보면 후일 할아버지의 묘비에도 익숙한 듯 낯설게 새겨져 있었다. 함경북도 OO군 OO면. 나는 그 짧은 주소가 좀처럼 입에 붙지 않았다. 아주 가까운 거리 같으면서도, 마치 지구 바깥에 위치한 도시처럼 까마득하기만 했다.


할아버지가 떠난 지 벌써 십 년도 넘게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그 일화들을 아프게 떠올린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훨씬 사무치는 기분이다. 미처 묻지 못한 질문이 가득한데, 그 대답을 더 이상 청할 방법이 없으므로. 대신 어머니를 통해 유구한 사연을 접할 뿐이다. 할아버지의 집이 있던 흑석동은 한참 전에 재개발 지구로 묶였다. 이미 허물어졌거나 앞으로 허물어질 낮은 주택 단지들. 나에게는 그 일대가 어쩐지 할아버지의 운명과도 겹쳐 보였다. 한 시절을 송두리째 철거당한 비참이란 무엇일까. 한 번은 무엇이든 써 보려다 도무지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워 세탁기 소음에 파묻혀 흐느꼈다. 그렇다고 그만두자니 나의 무지와 망각이야말로 또 다른 분단선이 될까 어쩔 줄 몰랐다.


물론 할아버지의 삶이 불행하지만은 않았을 거다. 여느 인생처럼 나름의 기쁨과 슬픔이 한 데 뒤엉켰으리라. 하지만 어떤 기억은 거대한 행성이 되어 가슴에 박힌다. 다가가지도 멀어지지도 못한 채 이후의 일상은 주변 궤도를 맴돈다. 그런 아득함이 꼬리를 물면, 그게 과연 할아버지만의 문제인지 고민스럽다. 그 많은 실향민들은 지금 어디쯤에 있나. 나는 할아버지가 두고 온 세계를 만날 수 있나. 한 번은 무슨 토론 수업에서 남북 관계를 주제로 찬반을 논하다 자리를 박차고픈 충동이 일었다. 정세니 편익이니 비용이니 하는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정작 중요한 무언가가 빠진 듯했다. 모두가 할아버지에 대해 함구하기로 작정했는지 그게 참 약속했다. 여기 세대를 타고 흐르는 울분이 있는데.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윤동주가 쓴 <서시>를 통해 나는 할아버지를 아로새긴다. 해를 거듭할수록 무수한 풍경들이 잊히고, 할아버지 역시 그렇게 두 번 죽어가는 것만 같아 겁이 난다. 그러니까 나의 사랑은 할아버지가 영영 사라지지 않도록 붙잡으려는 간절함의 뜻이다. 그리고 지우려야 지워지지 않는 흔적들이 있다. 최근 들어 사진을 찍기 시작한 나에게 어머니는 웬 낡은 필름 카메라 하나를 선물했다. 그 출처를 물으니 할아버지가 사용하던 유품이었다. 허름한 덮개를 열자 과거에 자주 맡던 냄새가 물씬 풍겼다. “할아버지 방에서도 이런 냄새가 났어요.” 어머니는 정말 그러냐며 신기해했다. 나는 그런 것들에 대해 여지없이 곱씹는다. 한 생애는 그만큼 질기도록 상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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