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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잠 Jan 23. 2023

절에서 개 키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찰은 개를 돌보지 못한다

지금까지 근무했던 사찰에는 모두 개가 있는 곳이었다. 사찰의 특성상 대부분 산에 있는 목조건물이며, 다수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곳도 많다. 24시간 열려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밤늦은 시간에도 마당에 놓인 촛대에 초를 켜려는 사람들이 방문한다. 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자칫 실수라도 하게 되면 대형 산불로 이어질 위험이 있어 불조심은 모든 사찰에서 제일 신경 쓰는 문제다. 개가 짖으면 스님과 직원들은 방에서 나와 경내를 둘러보고 이것저것 확인한다. 사찰의 개는 낯선 사람의 방문을 알려주는 야간 지킴이 역할을 한다.    

 

차우차우 품종의 나이 많은 개를 키우는 사찰이 있었다. 그 절의 주지 스님이 임기가 끝나 절을 떠나게 되었고, 새로 머물게 될 사찰은 정해지지 않아 개를 데리고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신도들에게 입양을 부탁했으나 차우차우는 소형견이 아니기 때문에 실내에서 키우기 쉽지 않았고, 나이도 많고 병도 있어 아무도 데려가지 않았다. 마지막 선택은 새로 오는 스님께 개의 남은 시간을 부탁하고 떠났다. 새로 오신 스님은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개를 좋아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개가 부담이었던 스님은 며칠 지나 구청에 연락을 했고 개는 절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안락사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반려인인 나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반려동물에 대한 시선은 다양하다.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무서워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키우던 반려견을 남겨 놓고 떠난 스님의 마음도 이해하지만, 구청으로 보낸 스님의 입장도 이해가 된다. 안타까운 것은 맡기기 전에 상대의 취향을 먼저 확인했다면, 맡기 전에 본인의 의사표시를 분명히 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타협점을 다시 찾아 개가 낯선 이의 손에 끌려가서 안락사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찰에 개가 살게 되는 이유가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절에 계신 스님이 좋아해서 또는 사람들이 키우던 강아지를 사찰에 버리고 가서 등의 이유로 살기도 한다. 다음 정착지가 정해져 데리고 가는 분들도 계시고, 끝까지 키워줄 곳을 찾아 맡기기도 한다. 가는 분은 바랑 하나 메고 떠나면 되지만 주인을 섬기던 개는 스님이 데려가지 않으면 덩그러니 혼자 남게 된다. 어딘가에 버려지는 것이나 스님들께서 키우던 동물을 두고 떠나는 것이나 어차피 개의 입장에서는 주인에게서 버려지는 것이다. 스님이 떠나는 순간 개의 주인은 사찰이 된다. 사찰은 개를 돌보지 못한다. 개는 사람이 돌봐야 하는 동물이다. 주인인 사람이 사라진 개를 사찰에 있는 누군가 돌보느냐 돌보지 않느냐는 남은 개의 운명이다.               


엄마와 함께 사는 ‘금강’이라는 이름을 가진 강아지도 인연 있는 스님의 반려견이었다. 어느 날 한 신도가 자기네 집 강아지가 새끼를 낳았는데 이쁘게 생겼다며 스님께 선물이라고 덥석 안기고 간 녀석이다. 3개월이 막 지난 강아지는 두 손에 담길 만큼 작았고,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은 태엽을 감으면 걷는 강아지 인형 같았다. 스님은 강아지의 아장거리는 귀여움에 빠져 신도의 말을 거절하지 못했다. 1년 정도 함께 지낸 후 스님은 강아지를 남겨두고 떠났다. 녀석은 머물 곳이 없어졌고, 사무실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병원 데려가는 일이나 자잘한 보살핌은 내가 했지만 그렇다고 주인은 아니었다. 처음 데리고 왔던 신도에게 돌려보내려 했으나 그분도 데려가지 않았고, 다른 신도들에게 분양하려 했으나 그것 또한 이뤄지지 않았다. 사무실에 계속 둘 수 없어 주로 내 방에서 살았으나 그것도 여의찮을 때는 여직원들이 각자의 방에서 돌아가며 키우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한 달여 동안 절을 비운 후 사무실로 돌아갔을 때 애교 많고 귀엽던 모습은 사라졌고, 호기심으로 천방지축 날뛰던 금강이는 없었다. 눈빛이 풀린 채 초점 없이 여기저기 눈치를 보는 낯선 강아지가 한 마리 있을 뿐이었다. 내가 없는 사이 밥을 챙겨주던 분의 이야기로는 동물을 싫어하는 사람들과 부딪히며 발에 차이고 괴롭힘을 당했다고 했다. 누구도 책임지고 맡아주지 않으니 무방비 상태로 방치되었다. 사직서를 내고 나오는 날, 나를 따랐던 기억이 있는지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녀석과 마주쳤다. 집에는 이미 강아지를 키우고 있었기 때문에 데려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더군다나 내가 아니라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을 텐데 두 마리는 버거울 것 같았다. 이미 눈은 마주쳤고, 나는 고민을 했으나 ‘집에 가면 죽었다.’ 생각하면서 두 팔로 강아지를 안고 차에 태우고 있었다. 사실 집에 있는 강아지도 스님이 절에 두고 간 강아지였다. 이렇게 난 절에 남겨진 두 마리 애완견의 반려인이 된 것이다.     


반려동물과 함께 산다는 것은 그 일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반려인에게 생긴다는 뜻이다. 가끔 인연 있는 스님들의 사찰에 개가 있는 모습을 보면 “스님, 절에서는 개 키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중에 데려가지 못하시면 어쩌려고요.”라고 이야기한다. 스님들 이동 특성상 끝까지 책임지기 쉽지 않으니 좋아해도 키우지 말라고 한다. 밤 동안 사찰이 걱정돼도 키우지 말았으면 좋겠고, 신도들은 스님들께 키우라고 데려다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절뿐 아니라 어느 곳이든 반려동물을 버리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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