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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잠 Oct 13. 2023

단 하나의 마음


     

새벽 2시. 할머니는 깜깜한 새벽에 나를 깨웠다. 주름 가득한 손으로 내 머리를 빗기고 따뜻한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인 다음 옷을 입혔다. 할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몸짓으로 전 날 저녁에 깨끗이 씻긴 나를 단장시키고 미리 준비해 놓은 분홍색 보자기 꾸러미를 집어 들었다. 다림질이 잘 되어 있는 보자기 안에는 향과 양초 그리고 쌀 한 봉지가 들어있었다. 나는 잠 덜 깬 눈을 비비며 고사리 작은 손으로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하얀 버선코를 따라나섰다. 가로등 길을 따라 골목을 벗어나 택시를 탔다. 할머니의 토닥거림에 다시 잠이 들었다가 조용히 흔드는 손놀림에 눈을 뜨면 여전히 밖은 깜깜한 시간에 절에 도착했다. 


절에 들어서면 할머니는 제일 먼저 법당으로 갔다. 정면에 계신 부처님을 향해 인사를 마친 후 한쪽 벽에 줄지어 있는 작은 호롱불이 있는 곳으로 가셨다. 그중 한 개의 등 앞에 멈춰 타고 있는 심지를 끄고 뚜껑을 연 후 짧아진 실을 쭈욱 뽑아낸 다음 기름을 붓고 다시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옆에 놓인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호롱불 앞에는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할머니는 내 등뿐 아니라 심지가 짧아진 다른 사람의 등에도 기름을 채워주고 심지를 다듬어주셨다. 할머니의 손끝에 따라 꺼졌다 켜지는 불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있어 졸졸 따라다니는 일이 시들해지면 법당에 쌓인 방석으로 썰매 타듯 법당 안을 돌아다녔고 그것마저 재미가 없어지면 불단(부처님이 계신 단상) 아래 공간으로 숨바꼭질하듯 숨어 들어가 잠이 들곤 했다. 


모든 절에는 인등이라는 것이 있다. 법당 한쪽에 한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는 작은 등을 인등이라고 부른다. 인등은 이름이 적혀있는 사람을 지켜준다는 호신불의 의미로 밝힌다. 나는 이직을 하면 제일 먼저 신경 써서 인등을 정리한다. 오래된 이름표는 예쁘게 새것으로 바꿔주고, 전구가 꺼진 등은 새로 교체해 준다. 사람들의 간절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시간은 기름에서 전구로 흘렀다.


허리춤에서 꼭꼭 접어놓은 지폐를 꺼내며 우리 손주 인등값이라고 내고 돌아서는 뒷모습에서 할머니를 본다. 어린 나는 할머니를 따라다녔을 뿐 그 손끝에 담긴 마음을 몰랐다. 옛 어른들이 정화수 떠놓고 간절하게 빌었듯이 ‘우리 손녀 편안하게 해 주세요.’라고 바라는 간단하고 간절했던 마음을 알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의 단 하나의 마음은 가족의 편안함과 행복을 바라는 마음임을, 전날부터 준비해 놓은 보자기 보따리를 들고 나선 새벽길의 마음을 일을 하면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오후, 처마 끝 풍경에 업혀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바람소리에 세상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법당을 향해 걸어간다. 다른 이들의 불도 신경 써주던 할머니의 마음으로 법당을 둘러보고 인등을 확인하고 그 길을 다녀 간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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