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을 벗어나다
네번째 가방인 메신저백이 사람들과 만나게 된지도 2개월이 지났다. 나름 계획하면서 제품군의 밑그림을 그리고 확장해나간다고는 하지만 생각과 현실의 간극이 분명히 존재하고, 그로 인해서 그리는 청사진 역시 시시때때로 바뀌고는 한다. 요즈음은 가방보다는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부수적인 제품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있고, 기회가 될 때 마다 기획을 하고 있다.
이런 저런 이유가 많겠지만, 혼자 일을 하기 때문에 필연적인 물리적인 시간의 한계가 가장 크다. 생산과 배송에 직접적인 시간 투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관리하고 판매된 제품의 CS에 대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분리되는 제품이 많고 비교적 복잡한지라 사소하게라도 CS 소요가 다른 제품들에 비해서 많이 발생하는 것 역시 지금과 같은 방향을 지속하는 것을 망설이게 하는 이유가 된다.
그런고로 지난 몇주간 나의 머릿속은 '악세서리'라는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권 지갑이나 배터리 케이스, 캐리어 네임택까지. 그 무엇이 되었든 되도록 간단하고 부담없이 접근할 수 있는 가격대를 가진 제품을 만들고 싶어서 인천공항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공항에서 뭘 하느냐는 질문을 언제나 받는데, 사람 구경한다.
메고있는 가방, 입고있는 옷, 손에 들려있는 짐, 옆을 지나가면서 들려오는 대화. 그 모든 것들을 보고, 듣고, 기록으로 남긴다. 낙서와 별반 다르지 않은 기록들이 쌓이다보면, 어느순간 어설픈 그림이 완성되고 제품이 된다.
이번에는 그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렸다. 무슨 제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아무런 생각이 없이 그저 떠돌았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관찰하고 머릿속에 그 모습을 넣어보았지만 마땅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유독 힘들었던 시간들이었다.
'번뜩인다'라고 하지 않는가.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에 스치는 생각이었다. 2주가 다 되어갔을 즈음, 캐리어가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간 캐리어에 아예 무심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도무지 캐리어에 정을 붙이지 못하는 나의 눈앞에 선명하게 어른거리는 존재는 아니었다.
캐리어 위에 얹어진 가방이 그렇게 불편해보일 수 없었다. 손잡이에 고정하려고 갖은 수를 써보지만 전혀 편해보이지 않았다. 불안하게 얹어진 가방을 꼭 잡은 손은 쉴 틈이 없었다. 그나마 남은 한 손에는 죄다 여권과 항공권이 들려있는데, 전화 한 통 받자고 용을 쓰는 모습은 안쓰러울 정도이다.
아마 평소라면 '다른 가방을 메고다니지'라는 생각을 했겠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러지 않았다. 핸드폰을 꺼내 메모장에 떠오른 생각을 급하게 적어내려갔다. 혹시나 떠오른 생각이 사라질까, 한순간도 쉬지 않고 써내려갔다.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조금 더 구체적인 구상을 시작했다. 사용하는 캐리어의 크기, 가장 중요한 손잡이의 폭, 캐리어의 두께같은 것들을 찾아보며 어떻게 하면 가장 사용하기 좋은 형태와 크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계속 고민했다.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의 새로운 제품은 저 한 장의 그림에서 탄생했다.
이렇게 말이다. 조금이라도 설명하기 복잡한 부분이 있을까봐 못그리는 그림을 고치고 또 고치는 것이 일인데, 이번에는 단 한번도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샘플조차 이틀만에 나왔다.
가방을 둘러서 싸맬 수 있는 끈 하나와, 손잡이 사이에 끼울 수 있게 고안된 주머니가 연결된 정말 간단한 녀석이다. 캐리어 손잡이 사이에 저 벨트를 끼우고, 가방을 얹은 다음 버클만 채워주면 된다. 캐리어와 가방을 분리하는데 별도의 동작이 전혀 필요없기 때문에 기존의 사용자 경험조차 해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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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펀딩을 시작했다. 평균 단가가 만원이 채 되지 않아서 걱정을 많이 했지만 다행히 첫날부터 100%를 달성하며 순항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