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도시 치앙마이 일기
치앙마이의 이튿째 날이 밝았다. 첫 날은 밤 11시에 체크인을 함과 동시에 끝났기 때문에 실질적인 첫 날이라고 볼 수 있다. 하루가 지났어도 정신없는건 매한가지지만 일단 눈 앞에 펼쳐진 일상을 즐기는게 더 중요하다.
느즈막히 일어나서 환전부터 했다. 해외에서 쓸 수 있는 GLN과 해외 전용 카드도 들고 왔지만 동남아는 역시 현금내는 맛이 있다. 환율도 저렴할 때 바꿔서 뿌듯했다.
이제 동네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너무 예뻤다. 동네가 그냥 내 스타일이다. 요기도 물론 우당탕탕 도시생활이지만 그 안애 초록초록한 풀들이 있다. 햇빛이 정말 강해서 시시각각 보는대로 초록색이 노란색도 되었다가 검은 색도 된다. 풀들 사이엔 예쁜 꽃들도 종종 섞여있는데, 도시속에 이렇게 거대한 초록덩어리들을 보다보면 이질감이 들면서도 정말 행복한 기분이 든다.
아침에 산책을 마치고 홀린듯 검색도 안해보고 들어간 음식점에서 인생 카오소이를 맛보고, 꾸덕 그자체인 망고 쉐이크를 마셨다. 원래 음식점 들어가기 전에 구글맵이나 트립어드바이져에 검색을 꼭 해보는 편인데, 감성에 맡긴 선택임에도 대단한 선택이었던 터라 먹으면서도 히죽히죽 웃었다. 이거 완전 행운아 아니냐구
너무 더워. 그것만 아니면 1만보는 더 걸었을 것 같은데 날씨가 35도 언저리다. 밤이 되면 선선한 바람과 함게 28~30도 선을 지켜줘서 걷기 딱 알맞지만 12시~3시 사이에는 숨도 쉬기 힘들다.
그래서 아침 일찍 움직이고 숙소에서 오후에 낮잠을 잔 다음 저녁이 올 즈음 움직이기 시작하는 부류도 있다. 나도 한번 움직여보니 왜 그렇게 하는지 알겠다.
근데 혼자 여행온 입장에서 아무리 성인 남성이라도 밤에 돌아다니기가 쉽지 않다. 혼자 갈 곳도 마땅치 않고. 이렇게 말하니 애석하네
그럼에도 첫날 버프인가. 나는 2만보나 걸었다. 동남아는 특히 택시비가 엄청 저렴해서 막 타고다녀도 되지만 나는 워낙 걷는 여행을 좋아해서 택시를 잘 타지 않는다. 택시비 2천원이면 갈 거리를 37~8도 땡볕에 40분을 걸어간다.
엄청 먹는 사람도 아니라 아마 여행이 끝나면 살이 좀 빠져있지 않을까 싶다.
밤에는 귀여운 고양이도 만났다. 태국 고양이는 사람을 그리 경계하지 않는다. 내가 봤을 때 더워서 피하지 않는 것일 확률이 더 높다.
오늘 종일 걸으며 해낸 생각을 소개해주고 싶다.
일을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어떤 이에게 만약 어떤 억만장자가 한 5천만원을 턱 쥐여주며 지금 당장 100일 간 세계여행을 다녀오라고 했다고 가정해보자.
모든 사람이 옳커니 하면서 출발할까? 나는 안갔을 것 같다. 당장 그 돈으로 해외여행 다녀오면 다 쓰거나 얼마 남지도 않을 것인데, 시간은 시간대로 흘러있고 실무능력의 측면에서는 전혀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3달이라는 물리적인 시간은 인생에서 딱 3개월만 차지하는게 아니라, 일을 구하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을 포함하면 거의 반 년에 해당하는 시간을 뺏어갈 수도 있다. 세계여행이라는 경험이 내 인생을 책임져주진 않을것이니까.
만약 그 제안을 한 사람이, 10년후의 나라면 어떨 것 같은가?
벤저민 하디의 책 퓨처셀프에서는 미래의 나와 긴밀히 소통하며 살아가라고 말한다. 그 녀석은 과거의 내가 저지른 일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녀석이지만 반대로 이렇게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나 사이읭 간극을 좁혀가는게 진정한 가치니까.
나는 잘 쉴 줄 모르는 사람이다. 쉰다고 해놓고 도파민에 절여져 시간을 죽일 줄이나 알지. 그렇게 잘 쉬지도 못하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 악순환을 반복하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오늘 이런 생각을 했다. 10년 뒤 미래의 내가 비행기표를 결제해준건가. 쉬는 법을 배워오라고.
이렇게 행복하게 쉬고 있는데 무슨 말이 필요할까.
분명 열심히 출퇴근 할때는, 일만 때려쳐봐라 내가 팡팡 놀아주마 했지만. 정작 일이 없어지니 불안함에 초조함이 더해 구직활동 이외의 행동에 디버프가 걸려 놀더라도 노는게 아니고 쉬더라도 쉬는게 아닌 상태가 되버렸다.
오늘로 그 굴레를 끊었다. 더이상 초조하지 않음을 선언하는건 아니지만, 왜 그런지 알겠고 그렇지 아니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나는 미래의 내가 사준 비행기표에 몸을 실은 사람이다. 잘 쉬고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