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나 하지
치앙마이에서의 세 번째 해가 떴다.
작열이라는 용어가 매우 알맞다고나 할까
이곳에 떠있는 태양은 우리나라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다행히 해는 쨍쨍한데 나무가 많아서 그늘도 꽤 있고, 동남아인데도 이상하게 습하진 않아서 걷기 나쁜 날씨는 아니다. (사실 대낮에는 좀 나쁘다)
오늘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씻지도 않고 산책을 했다.
집 앞 카페에서 한 3시간 동안 내리 책을 읽었다. 인간실격. 재밌더라.
이렇게 좋은걸 왜 미뤄왔을까. 나는 왜 마음 편히 쉬지 못하는가.
이 시기에, 이 조건에, 이 환경에 할 수 있는 건 해야 한다. 한두 달 전이었으면 회사에 가야 해서 못했고, 두세 달 전이었으면 여자친구가 있으니 못했을 거다. 여행이 딱 그렇다. 이때 가려니 이게 걸리고 저 때 가려니 저게 걸리는 게 여행이다.
직장 다니는 중에 조금의 여유라도 생겼으면 바로 치고 나갔을 것을 지금은 믿는 구석이 사라지니 바로바로 결단을 못 내리는 것이다 사실 퇴사하고 2주가 지난 지금, 말은 이렇게 해도 나는 마음이 불편하다. 내가 정말 중요하게 여기는 커리어가 산산조각 나고 있다. 개발자로서 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 다방면으로 충분한 기여를 하고 있지 못하는 것처럼 스스로 느껴져서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그렇다고 생산적이고 희망찬 생각을 안 하는 건 아니다. 발버둥이라면 발버둥이랄까, 내가 생각하는 정답을 찾고 이뤄보려 노력하고 있다. 이건 사실이다.
점심을 먹었다. 집 앞이라 지나가다 흘깃 본 가게인데 리뷰도 조금밖에 없어 긴가민가하다가 그냥 들어갔다. 이게 웬걸, 너무너무 맛있었다. 이번 여행은 운이 너무 좋다. 날이 정말 더웠는데 시원한 얼음물도 무한으로 제공되는 곳이었다.
기분 좋게 밥을 다 먹고는 코워킹 스페이스로 향했다. 치앙마이는 디지털노매드의 성지라 이렇게 코워킹 스페이스가 곳곳에 있다. 내가 간 곳은 쇼핑몰 안에 널찍한 곳이었는데 거의 도서관처럼 조용히 자기 할 공부를 하는 곳이었다. 오늘은 내 루틴 중 하나인 분기 리뷰를 하는 날(분기 마지막 주 금요일)이라 거의 5시간 동안 분기를 돌아보는 글을 썼다.
쇼핑몰에서 밥도 먹고 구경 좀 하다가 마트에서 과일도 왕창 사고 집에 왔다. 도착하니 저녁 9시네. 아무리 성인 남성이라도 외국에 혼자 다니면 무섭다. 그래도 도시라고 치안이 나쁘지 않지만,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르니 조심하는 게 좋다.
이렇게 3일 차는 끝이다. 아직 내가 이렇게 여유와 낭만을 즐겨도 되는지 확신은 안 서는데, 일단 즐기고 있으니 최선을 다해서 즐기고 싶다. 내일은 올드타운 쪽을 걸어봐야지.
이 글의 핵심은 조바심이다. 조바심은 될 일도 안되게 만드는 몇 없는 부정적인 카테고리 중 하나다. 물론 앞으로 발생할지도 모르는 일을 고려해서 살아가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 조바심이라는 감정이 섞이면 좋지 않다.
그래서 이번 여행의 테마는 놀면 뭐 하니다. 낙성대 6평 원룸에서 무엇이 이루어지겠는가. 취업을 준비한답시고 벌어둔 돈을 야금야금 까먹으며, 오늘 하루도 공부 열심히 했다는 자기 위로를 하며 지나가겠지. 놀면 뭐 하냐, 그 시간에 여행이나 하자.
Que sera sera. 어쩔 땐 이 말이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