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여행기 5. 다르게 숨쉬기
지금 저는 다낭에 와있습니다. 경기도 다낭시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이곳은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여행지라고 합니다. 근데 이 정도로 한국 친화적인 줄은 몰랐습니다. 분명 비행기를 타고 왔는데, 해외를 온 것 같은 느낌이 조금 덜 느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떤 요소가 여행을 여행답게 만들까요? 왜 국내 여행에 비해 해외로 가면 더 여행을 간 것 같을까요? 다낭은 왜 경기도 같은 느낌이 난 걸까요.
보고 듣고 느끼는, 즉 모든 감각이 받아들이는 요소들이 익숙하다면 그 요소는 정보로 입력되고, 익숙하지 않다면 풍경으로 인식됩니다.
가령 길을 걷다가 흔히 볼 수 있는 간판에 쓰인 언어가 한국어라면 보는 순간 그 형상이 가진 의미를 해석하고 정보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그 언어가 베트남어라면, 스페인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언어인지 아닌지 조차 판별이 안 되는 형상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건 정보가 아니라 그 옆의 가로수나 보도블록처럼 하나의 풍경이 됩니다.
물론 이 사실이 반대로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당장 수많은 정보를 조합해서 타야 할 버스를 정하거나 사야 할 응급 약을 고른다는 식의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면 말이에요. 하지만 이건 특별한 경우에요.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정보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처럼 정보가 주던 어지러움이 풍경으로 분리되면서 낯선 여행지에서 받아들이는 정보의 양이 현저히 줄어듭니다. 마치 글자가 안 보일 만큼 멀리서 본 문장이 점 몇 개가 찍힌 그림처럼 보이듯, 그것을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게 됩니다. 내용은 알아듣진 못해도 팝송을 그 자체로 즐기는 것 처럼요.
항상 마시던 카페, 늘 점심을 때우던 밥집, 이따금씩 책을 읽으러 가던 공원, 2차로 항상 가는 술집, 정기적으로 운동을 배우러 가는 학원. 이처럼 우리의 생활반경에는 익숙한 공간들이 있습니다. 이를 확장하면 위와 같은 거점 공간들을 주변의 공간들 또한 관련 정보로 머릿속에 기억됩니다.
하지만 여행지에서는 그런 정보들이 전부 무용지물이 돼요. 저는 이를 새로운 환경에 격리되었다 말합니다. 어떤 의사결정을 내리던 평소 하던 것들을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처럼 공간의 격리는 여행 그 자체가 됩니다. 저는 여행 가서 산책, 커피, 책, 맥주 이렇게 4가지를 주로 합니다. 관광은 꼭 봐야 할 것들만 최소한으로 하고 그 대신 하염없이 걷거나 버스를 타고 동네를 도는 여행을 해요. 이런 말을 하면, 그럴 거면 집 앞에서 하라는 사람이 대다수입니다. 뭐 하러 큰돈 내고 해외여행 가서 그런 일을 하느냐는 거죠. 하지만 격리된 공간에서 하는 하던 일들은 새롭습니다.
베트남에서 느낀 확실히 우리와 다른 문화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오토바이입니다. 도로를 꽉 메운 오토바이를 보고 있자면 확실히 내가 베트남에 있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길을 건널 때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아직도 적응이 안돼서 미취학아동 마냥 길을 혼자 건너지 못합니다.
새로운 음식이나 먹는 방식도 좋은 예시입니다. 여기서 먹은 음식들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소스가 꽤 독특한 향을 내는데, 어딜 가든 그 소스가 있더라고요. 생선이 많이 나는 동네라 이런 소스가 발달한 것인가 싶었습니다.
이와 같은 문화의 측면에서의 괴리도 내가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문화의 괴리에서 오는 편안함, 불편함 모두 그 감정보다는 그 다름을 인지하는 과정 속에 존재합니다. 그렇게 인지된 괴리감은 우리가 여행 중임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다낭은 관광지가 잃지 말아야 할 것을 잃는 중인 도시 같습니다. 정말 예쁜 강이 흐르고, 옥색 바다를 가지고 있지만 그걸 팔기 위해 문화 그 자체인 언어와 공간을 내준 느낌입니다. 한국어 간판이 즐비하고, 직원들은 간단한 한국어를 구사했으며 대부분의 가게에서 한국어 노래가 나왔습니다.
다낭 중에서도 관광지인 미케비치 주변 상권은 마치 전염병처럼 한국어가 상권을 접수한 상태였습니다. 어떤 골목은 전체가 한국어 간판을 쓰고 있었고요. 한국식 포차 같은 문화 또한 흡수 중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물론 정보가 닿지 않은 곳들은 아직 예전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 한국어 메뉴제공, 한국식 인테리어, 직원 한국어 교육 등이 돈이 된다는 사실이 주입되면 바뀌는 건 삽시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여행지에서 좋은 사진이나 영상을 찍고 나면, 이 사진에 지금 부는 바람도 함께 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결국 궁극적으로 여행을 여행으로 만드는 요소는 여행지 그 자체입니다. 그곳에서 숨 쉬는 것 자체가 의미를 가지게 돼요. 여행지가 익숙하면 익숙한 대로, 새롭다면 새로운 대로 해석하는 본인에게 달려있습니다.
다만 나의 의지와는 별개로, 여행지는 편의를 제공하는 수준을 벗어나서 아이덴티티를 내려놓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방인들을 위해 문화와 언어를 변질시키는 것은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한국어나 영어로 주문을 하는 제 자신도 반성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