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은 서진의 책방을 다시 찾았다. 책방은 여전히 단정하게 꾸며져 있었고, 책을 정리하는 서진의 모습이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였다. 그녀는 조용히 책장을 닦고, 책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마치 책장 속에 자신의 삶을 하나하나 채워가고 있는 듯 보였다.
"또 왔네?"
서진이 밝게 웃으며 지훈을 맞이했다. 지훈은 책방 안을 둘러보며 가볍게 웃었다. 서진은 그에게 따뜻한 차를 내왔다. 의자에 앉은 지훈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여기 참 좋다."
지훈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바람도, 소리도, 사람들이 사는 모습도. 여긴 시간이 천천히 가는 것 같아."
"그치? 그래서 내가 여길 좋아해."
지훈은 잠시 머뭇거리다, 창밖 너머 멀리 보이는 바다에서 잔잔하게 밀려오는 파도처럼, 서서히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동안 하루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갔거든.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 보니 내가 뭘 위해 이렇게 달려왔는지 모르겠더라고."
"그렇게 바쁘게 살아온 건, 그땐 그게 중요했기 때문이었을 거야"
"맞아. 처음엔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된다고 생각했고, 목표도 있었어. 근데... 어느 순간 내가 왜 이렇게까지 애쓰고 있는지 모르겠더라고."
서진은 지훈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여기 온 거야?"
지훈은 작게 웃으며 고백했다.
"응. 사실 처음엔 그냥 도망치고 싶었어."
서진은 그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분주하게 살다 보면, 자기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모르게 되는 것 같아. 나도 한때는 큰 꿈도 꾸었고, 열심히 노력도 했어. 근데 어느 순간 그 꿈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 같아서 여기로 도망쳤어. 도망쳐 오기 좋잖아, 여기."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었다. 어쩐지 공범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진은 책방을 슬쩍 둘러보면서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처음엔 많이 후회도 했어. 여기 온다고 갑자기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래도 이곳에서 천천히, 나다운 삶을 찾았던 것 같아. 어쩌면 난 처음부터 돌아오기 위해 떠났던 걸지도 몰라."
지훈은 창밖으로 바다를 내다보며 말했다.
"나도... 여기서 뭔가 찾을 수 있을까?"
서진은 그의 말에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너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시간을 보내 봐. 그동안 찾지 않아서 보이지 않았던 것뿐일지도 몰라."
그녀의 말이 부드럽게 지훈의 마음을 감싸 안았다. 지훈의 표정은 점점 밝아졌고, 그런 지훈을 보며 서진은 빙그레 웃었다.
"예전 생각나네. 그땐 정말 단순했는데. 바다 보면서 그저 웃고 떠들고. 그때도 정해진 건 없고 미래가 불안하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기대감이 있었던 거 같아."
지훈의 말에 서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그땐 너무 자유롭고 거침없어 보여서 부러웠어. 항상 뭔가를 해내겠다는 확신이 있었잖아. 어쩌면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는지도 몰라."
다음 날 아침, 지훈은 오랜만에 깊게 자고 일어났다. 가벼운 마음으로 숙소를 나와 작은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아침 바람은 부드럽게 그의 머리카락을 스쳤고, 바다 냄새가 짙게 풍겨왔다. 바다를 따라 난 길은 고요했고, 그 고요 속에서 지훈은 자신의 발소리를 새삼스럽게 느꼈다. 천천히 걷다 보니 복잡했던 머릿속은 점점 정리되었고, 불안했던 마음은 바람에 실려 바다로 흩어지는 듯했다.
길 끝에 다다르자 걸음을 멈추고 바다를 바라봤다. 잔잔하게 밀려왔다 되돌아가는 파도에 실려 서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시간을 보내 봐.'
파도는 멈추지 않고 반복되었다. 밀려오는 물결이 자신을 감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자신에게도 다시 움직일 기회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했다.
서울에서는 온몸이 무거워서 움직이기도 힘들었는데 이곳에서는 더 이상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비록 아직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히 알 수는 없었지만, 희미하게나마 자신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겨났다.
햇살이 서서히 높아지며 그의 발걸음을 비췄다. 지훈은 마을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마을로 가는 길이 아직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좋게 느껴졌다. 이 길이 익숙해질 즈음에는 마음속 어딘가가 분명히 채워져 있을 것이다.
오늘도 서진을 다시 만날 생각에 발걸음이 조금 더 가벼워졌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미소가 그의 입가에 번졌다.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더 나아진 느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https://youtu.be/A3TuEo8Cae0?si=wDXJ1P3mR7BtKzq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