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바다의 기억"

by 이새벽

지훈은 마을에서의 낯선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그리고 익숙해지는 만큼 보이는 것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이 서진에게 보이는 애틋한 눈빛이나 속삭이는 말들에 어쩐지 묘한 느낌이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지나가다 들여다본 누군가와 밖에서 짧은 대화를 마치고 책방 안으로 돌아온 서진이 말했다.


"바다 보러 가자. 오늘 날씨도 좋고, 바닷가에 앉아 있기 좋을 거야."


지훈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책방을 나와 바닷가로 향했다. 바닷바람은 부드럽고 따스하면서도 서늘함을 숨기고 있었다. 서진은 커다란 돌 위에 앉으며 지훈에게 자리를 권했다.


"여기 앉아봐. 바다 소리가 더 잘 들려."


지훈은 그녀 옆에 앉아 바다를 바라봤다. 밀려들어온 파도는 하얗게 부서지며 부드러운 거품으로 사라졌다.


"바다는 늘 똑같은 것 같으면서도,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아. 여기서 지내다 보면 그런 게 보여."


파도를 바라보며 서진의 말을 가만히 듣던 지훈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서진이 너 참 사람이 단단해진 거 같아."


서진은 그의 말에 살짝 놀란 듯했지만 이내 미소 지었다.


"단단해진 거라기보단... 그냥 그렇게 보이려고 애쓰는 거야. 사실은 나도 불안하고 흔들릴 때가 많아."


"넌 여기서 정말 행복해?"


그녀는 잠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행복이라는 게 완벽하진 않잖아. 그래도 여기서 나만의 시간을 찾고, 내가 사랑하는 일을 하니까 만족해."


그녀의 대답은 솔직했고, 지훈은 그 대답에 조금 위안을 얻었다.


"마을 분들이랑 친한가 봐. 다들 살갑게 대해 주시고."


지훈의 말에 서진의 얼굴은 조금 어두워졌다. 그리고 대답했다.


"사람들이 다들 알고 있어. 내가 여기에 온 이유를."


지훈은 서진이 한 말의 온도와 무게가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다. 지훈은 더 묻지 않고 기다렸다. 서진은 한참 동안 무언가를 고민하듯 입을 열지 않았다. 지훈은 그녀의 곁에 조용히 앉아, 그녀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사람들이 나를 걱정하는 건, 내가 이곳에 왜 왔는지 알기 때문이야."


서진은 발 밑에 떨어진 나뭇잎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지훈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고백이 예사롭지 않을 것을 직감하며, 말을 재촉하지 않았다. 서진은 깊은숨을 내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도 한때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회사에 매달리며, 내가 그 일을 사랑한다고 믿었어. 그런데... 사실은 일에 매달리는 게 아니었어. 나는 그냥, 현실을 도망치고 있었던 거야."


그녀는 고개를 살짝 떨구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결혼생활이 순탄하지 않았거든."


지훈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에 놀랐다. 서진은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내 남편은 내가 직장에 매달리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어. 내가 직장보다 가정을 더 돌보길 바랐지. 하지만 나는... 일이 없으면 내가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었어. 그 사람은 그런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결국 우리 사이는 점점 멀어졌어."


지훈은 그녀의 이야기에 가슴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서진의 목소리엔 점점 더 깊은 고통이 담기기 시작했다.


"아들이... 하윤이가 있었어. 하지만 다른 엄마들처럼 하윤이를 제대로 돌봐 주지 못했어.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서진은 잠시 말을 멈추고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지훈은 느낄 수 있었다.


"그날도 바빴어.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하윤이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바로 회사로 갔지. 저녁에 하윤이를 데리러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비가 갑자기 많이 내렸어."


그녀는 한참을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윤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서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날, 하윤이가 학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어. 내가 회의를 마치고 전화를 받았을 땐 이미... 너무 늦었더라고."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지훈은 할 말을 잃고 그녀의 곁에서 묵묵히 앉아 있었다.


"남편은 나를 비난했어. 그날 하윤이를 데리러 가지 않은 건 내 잘못이라고. 나도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어. 내가 더 일찍 갔더라면... 내가 그날 일을 미뤘더라면..."


서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조용히 흐느꼈다.


"결국 우리는 이혼했어. 남편은 나를 용서하지 못했지. 그리고 나도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어. 그래서 여기에 왔어. 하윤이가 좋아하던 바다 가까이에 있으면, 내가 조금이나마 그 아이와 함께 있는 기분이 들 것 같아서."


지훈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밝게 웃으며 살아가는 것이 단순한 여유가 아니라, 깊은 상처와 싸우며 만들어낸 결과라는 걸 이제야 조금 알게 된 것 같았다.


"네 잘못이 아니야. 누구도 그 언제 어디서 사고가 날지는 예측할 수 없어. 넌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던 거야."


지훈은 그녀를 위로하려 애썼다. 서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하지만 내가 이곳에 온 건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야. 나를 용서하고, 하윤이와의 추억을 지키기 위해서야."


그날 밤, 지훈은 혼자 바닷가를 걸었다. 하얀 파도는 쉼 없이 밀려오고 있었다. 서진이 겪었던 아픔과 그녀가 선택한 삶을 떠올리며, 지훈은 처음으로 자신의 미래를 조금씩 다시 그려보기 시작했다. 별빛 아래 잔잔히 빛나는 바다를 보며, 지훈은 처음으로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가 단순히 도망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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