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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실은통한다 Jul 20. 2020

친구! 그 뜨겁던 겨울의 기억

나는, 누군가에게 뜨거운 존재가 된 적이 있을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감동이 된 적은 있을까.
아직까지 실천하지는 못한 것 같지만,
 ‘그것’을 목격한 적은 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어떤 겨울날, 색다른 별미를 먹고 싶다는 남동생에게 서툰 솜씨로 참치 김밥을 말아주고 있었다. 그런데 컨디션이 안 좋았는지, 동생은 두세 개 정도 집어먹고는 그냥 소파에 누워버렸다.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눈도 좀 풀린 것 같았고, 졸린 듯 눈을 껌뻑이는 모양새가 의식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서둘러 구급차를 불러 고대 안암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동생은 기절해 있는 듯 의식을 잃었고... 결과는 뇌출혈이었다. 암세포가 너무 커져버려서 뇌혈관이 터져버린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힘든 치료 잘 견뎌왔고 분명, 두 달 전까지 간이나 폐에 전이된 암세포도 깨끗하게 사라졌다 했었는데... 그 짧은 시간에 ‘암’이란 놈은 동생의 뇌까지 잡아먹은 것이다.

암 투병 10개월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때까지 동생은 친구들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자신의 아픈 모습을 보여주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이야기가 달랐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동생은 의식이 돌아왔지만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는 상태였고, 밥도 먹지 못해 오로지 음료수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동생의 마음이었다. 침대에 누워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현실이... 그를 비참하게 만들었고, 그 감정은 ‘분노’로 표출됐다.

가족에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고... 심지어 부모님에게 욕을 했다. 병원에서 ‘진상 환자’로 소문날 정도로 동생의 행동은 심해져갔다. 교수님은 암세포로 인해 전두엽을 많이 손실했기 때문에 성격이 좀 예민해질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런 아들을 지켜보는 부모님 마음은 무너졌을 것이다.

어떤 전환점이 필요했다. 고민 끝에, 동생의 20년 지기 친구 한 명에게 연락을 해 상황을 설명했다. 그래도 친구 얼굴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였다.

다음날 그 친구는 한달음에 병원으로 달려왔다. 혼자가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늘 붙어 다녔던 친구들 4명이 우르르 한꺼번에 온 것이다. 건강했을 때와는 너무 달라진 동생의 모습을 보고 혹여나 울면 어떡하지, 분위기가  숙연해질까 봐 걱정을 했다. 그런데,

“새꺄! 누워있으니까 ** 편하지? 완전 꿀인데?”

“ 야~ 병실 좋네? 여기 병원비 비싸지 않냐?”

“야 여기 배달음식 먹어도 되냐? 나 배고픈데 간만에 족발 시켜 먹을까?”

“아 진짜 족발 좀 그만 먹어~ 돼지새꺄! 빈손으로 와서 얻어먹으려고 하냐?”   
 
동생의 친구들은 예상과 달리 평소처럼 적당한 욕도 섞어가며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 어찌 보면 좀 철없어 보이는, 너무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어디가 아픈지, 언제부터 그랬는지, 지금 상태가 괜찮은 것인지... 그런 안부는 없었다. 친구들끼리 농담하며 주고받는 대화 틈에, 동생도 한 두 마디 자연스럽게 대화를 섞었고 30분 정도가 지났을까. 동생은 웃는 모습까지 보였다.

다음날은, 친구들이 동생을 휠체어에 태웠다. 병원 입원 한 달 만에 처음이었다. 가족들이 몸에 손이라도 대면 온갖 짜증을 내며 난리를 쳤는데, 친구들은 그런 동생의 태도를 무시하고 그냥 안아 휠체어를 태우더니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왔다.

그리고 다음날엔, 평소 동생이 좋아하던 순대와 닭발을 사들고 왔다. 휴게소 한복판에서 무슨 파티라도 벌어진 듯, 자기들끼리 하하호호 웃으며 떠들었다. 그렇게 또 하루, 또 하루... 가끔 바빠서 한 두 명 빠질 때도 있었지만, 친구들은 거의 매일 동생을 찾아왔다.

그중 한 명은 강원도 홍천에서 일했는데 퇴근하자마자 운전을 해서 서울까지 왔고, 또 다른 친구 역시 고대 병원과는 정 반대의 위치인 하남시에 살았다.

모든 친구들이 특별하지만 나에게 진한 감동을 준 친구는 민수(가명)였다. 그는 병원에 올 때마다 맛있는 음식도 사 오고, 핸드폰 게임도 동생과 함께 즐겼다. 하루 종일 누워있어 굳은 근육이 풀릴 수 있게 마사지도 해주었는데 동생은 그것을 매우 좋아했다. 이상한 곳을 만졌네, 아니네~  마사지 내내 투닥거리는 두 사내의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의 방문이 이어졌다. 밤 9시를 넘길 때면 오늘은 안 오겠지, 피곤할 텐데...라고 생각했지만 어김없이 병실로 들어왔다. 그보다 더 늦은 시간에도 찾아와 잠든 동생의 얼굴을 보고 간 적도 있다.

민수의 방문은 민들레 홀씨처럼 영향력을 뻗어갔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대학 동기들, 직장 동료들까지 동생을 찾아왔다. 민수가 사람들에게 동생의 근황을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찾아와 우리의 손을 잡아주었고, 동생에게 긍정 에너지를 주고 갔다.

이것은 우리 가족에게도, 동생에게도 굉장히 큰 변화를 줬다. 아픈 자신의 모습을 불쌍하게 바라볼 것이라고, 동정하는 그 시선에 비참해질 거라 생각했던 동생은, 오히려 다양한 사람들의 방문이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것이었다며 생각을 전환했다.

삶의 의지를 놓아버리려 했던 동생이 재활치료를 하면서 다시 걷는 연습을 했고, 가족들 역시 병원 생활에 지치지 않고 힘을 얻었다. 누군가 내 동생을 잊지 않고 찾아주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위로와 힘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동생은 본격적으로 글을 썼다. 감사함에 대해, 또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환자들을 위한 여러 가지 의학 정보에 대해서. 그런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뇌출혈로 쓰러졌던 그때, 동생은 매우 위험한 고비였지만 그 뒤로 8개월의 삶을 더 누리다 하늘로 떠났다. 동생 스스로도 덤으로 산 감사한 시간이라 고백했다.

그때 친구들이 없었다면... 주변의 따뜻한 격려가 없었다면... 그 소중한 8개월이란 시간이 없었다면... 

동생의 장례식장에서도 민수는 덤덤했다. 친구들과 농담도 주고받고 때때로 육개장 심부름도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발인 전날, 모두가 피곤해 잠시 눈을 붙였던 새벽 4시 즈음... 나는 그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짐승의 절규와도 같은, 서른 살 청년의 깊고 찢어지는 슬픔이 묻어있었다.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민수 역시, 20년 세월의 우정을 가슴에 묻고 있었다.

그 후로 3년이란 시간이 지났고, 나는 여전히 우정으로 가슴을 뜨겁게 태웠던 그 겨울이 생생하다.


어제는 민수의 결혼식이었다. 사정 때문에 참석할 수는 없어 축의금으로 성의를 보낸 것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진짜 백만 원이고 천만 원이고 아깝지 않게 주고 싶었는데... 살면서 다 갚아나가야지...!

나에게 '우정'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알게 해 준 민수가 누구보다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빌고, 글로나마 축복한다.  

우정이란, 또 다른 의미의 큰 사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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