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FJ 시아버지와 ESFP 시어머니, 그리고 INFJ 며느리를 곁들인
여기는 사랑이 넘치는 사랑의 병원 당신이 찾아 헤매던 바로 그곳,
오, 사랑의 병원으로, 오, 놀러 오세요.
- 자우림, 사랑의 병원으로 놀러 오세요.
작년과 올 해 가장 핫했던 밈(Meme)을 꼽자면 아마도 MBTI가 아닐까 생각한다. MBTI란 외향-내향(E-I) 지표, 감각-직관(S-N) 지표, 사고-감정(T-F) 지표, 판단-인식(J-P) 지표 등 총 4가지 지표를 하나씩 조합해 각 사람의 성격과 행동을 파악하는 검사이다.
이 MBTI를 주제로 한 유튜브 예능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검사 결과로 신입 사원을 거르거나 뽑는 회사도 생겼다고 하니 실로 파급력이 엄청났다. 당시 한참 MBTI에 빠져있던 나는 시부모님께도 MBTI 검사를 했었는데 시아버지는 ISFJ, 시어머니는 ESFP가 나왔었다.
평소에도 성격이 참 다르셨던 두 분은, 자율신경 실조증에 걸려 함께 살게 된 며느리를 사랑하는 방식도 참 달랐다.
MBTI 무료 검사가 정의한 ISFJ는 '용감한 수호자'이다. 무엇을 받으면 몇 배로 베푸는 진정한 이타주의자, 조용하며 책임감이 강한 사람, 꼼꼼하고 계획적으로 일하는 사람, 표현에 서툰 사람.
우리 아버님은 꽤나 ISFJ 집단에 가까운 분이시다. 평생을 군인으로 사셨던 아버님은 상당히 꼼꼼하시고 인내심이 강하시고 추진력이 굉장하시다. 말수가 별로 없으시고 다정하게 말하시는 것을 잘 못하지만, 농담을 툭툭 던질 줄 아시는 분.
아버님은 나에게 '너무 힘들었겠다, 괜찮냐'라는 말보다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주셨다.
내가 그나마 먹을 수 있는 브로콜리를 수확하시려고 밭을 다 갈아엎으셨다. 유기농만 먹어야 하는 까다로운 며느리 때문에 아침마다 애벌레를 잡으시곤 노동비를 청구하겠다며 농담을 치셨다. 덕분에 그 해 여름, 나는 사람 머리만 한 브로콜리를 처음보곤 박장대소하며 아버님과 함께 브로콜리를 수확했다.
나가는 것을 싫어하시는 천상 집돌이시지만, 내가 어딜 가고 싶다고 하면 못내 함께 가주셨다.
다음날 비 소식이 있어 다시 철수해야 하지만, 며느리와 마당에서 놀고 싶다는 어머니의 요청에 말없이 6인용 텐트를 쳐주시기도 했다.
또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서울에 있는 병원에 들르셔서 해결방법이 없나 찾으러 가시고, TV나 유튜브에 장누수 증후군에 관한 내용이 있으면 찾아서 공부를 하셨다. 그리곤 거의 100분 토론시간처럼 어떤 방식으로 치료를 이어나가는 것이 좋을지 자주 토론하곤 하셨다.
홀로 원인도 모르는 난치병과 싸우며 고독함과 외로움을 느끼던 나에게, 나만큼 병에 대해 공부하시는 아버님의 사랑은 흡사 전우애로 느껴질 만큼 깊이 있고 뚝심 있게 다가왔다.
MBTI 무료 검사가 정의한 ESFP는 '자유로운 영혼의 연예인'이다. 나는 처음에 무료 검사에 나온 이미지를 보고 어머님과 함께 빵 터졌다. 머리스타일부터 표정까지 딱 우리 어머님이었기 때문이다.
사교적이고 단순하고 낙천적인 사람, 정이 많고 사람을 좋아하며 솔직하게 털어놓는 사람. 타인을 기쁘게 해 줄 깜짝 쇼를 준비하며 즐거워하는 사람. 이런 분이 우리 시어머니시다. 어머님은 무뚝뚝한 군인 남편 옆에서 집안과 밖을 따뜻하게 데워놓는 역할을 톡톡히 하시는 분이셨다.
어머님은 내 주위에 붙어있던 우울과 슬픔을 따뜻함과 웃음으로 쫒아내 주시곤 했다.
나와 함께 마당의 정취를 즐기기 위해 벼르고 있던 '인디언 텐트'를 주문해 노래를 틀어놓고 함께 누워 피크닉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셨다. 어느 날 밤엔 텐트에 있다가 고라니가 암컷을 찾기 위해 꽥꽥 댄 적이 있었는데, 어머니와 나는 이 녀석을 쫓아내기 위해 이상한 괴성 내며 고라니와 소음 대결을 하곤 조그만 돌로 쫓아내면서 정말 실성하듯이 웃은 적도 있다.
아직 요리에 서툴어 비루한 밥을 먹고 있는 며느리를 위해,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조합하거나 새로운 요리를 창조해 먹이시곤 드디어 먹을 수 있는 것이 하나 늘었다며 함께 좋아하시곤 했다.
전날 제대로 자지 못해 울적해할 땐, 자연을 보며 행복해하는 나를 위해 운전해서 훌쩍 바다에 데려가 주시기도 했다. 그렇게 한번 예쁜 노을을 보고 나면 머리끝까지 찼던 슬픔과 우울이 씻겨져내려 가는 기분이었다.
끝도 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건강 상태에 머릿속이 복잡하고 우울해질 때,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필요할 때 항상 어머님은 진실된 마음과 밝은 에너지로 나를 사르르 녹여주셨다.
나는 홍성에 있으면서 시부모님으로부터 우리 부모님께 받고 싶었던 사랑을 그대로 받는 기분이었다. 사랑 표현이 너무나 서툰 데다 목회자인 우리 아빠는, 언제나 힘들어하고 있는 성도님들을 챙기는 것이 먼저셨고, 우리 집 경제를 홀로 책임지느라 밤늦게까지 성실하게 일하셨던 엄마의 빈자리는 언제나 할머니가 채워주셨다.
연세가 있으신 할머니는 늘 여기저기 아파하시며 힘들어하셨고, 언제나 사랑이 고팠던 막내인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살았지만 늘 부모님이 그리웠더랬다.
포기하는 심정으로 내려온 홍성은 말 그대로 '사랑의 병원'이었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치료하는 사랑의 병원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구름이 장막 같이 펼쳐진 하늘이 있는 곳, 새소리를 들으며 잔디 위에 이슬이 내린 마당에서 아침 스트레칭을 하는 곳, 자연을 보며 마당에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면 고양이가 다가와 자기 몸을 비비는 곳.
1시간에 한 번씩 깨며 잠을 설쳐 서러운 날에도 더 이상 텅 빈 집에서 혼자 울지 않아도 되는 곳, 뭔가 몸이 또 이상하다고 느낄 때 함께 고민할 수 있는 곳, 온몸이 간지러워 우울하고 짜증 나는 날에 어머니의 웃음소리로 다시 함께 웃게 되는 곳.
그렇게 나는, 사랑의 병원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강한 힘을 회복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