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와의 첫 데이트
긴장되는 마음을 애써 부정하고 홍성에 내려온 첫날, 아버님이 역까지 데리러 나오셨다. 살짝 긴장해서 무슨 말을 했는지 사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마당에서 꽃에 물을 주고 계시던 어머님께 어색하고 수줍은 인사를 드렸다.
"어머님...! 저 왔어요."
"어, 왔어?"
기억하건대 어머님의 표정이 해맑지만은 않았다. MBTI가 ESFP인 어머님은 항상 즐겁고 밝은 편이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어머님도 사실 어색해서 낯을 가리고 계셨던 것이다.
어색함과 다르게 생각보다 나는 시댁에 빠르게 적응했다. 아마도 그건 아버님, 어머님의 노련한 배려 덕분이리라. 두 분은 나를 너무 과하게 챙기지도, 그렇다고 내버려 두지도 않으셨다.
애써 먼저 나를 위로하거나 참견하지 않으셨고, 다만 내가 필요한 게 없나 종종 물어보시고 먹을 것을 공수해주시며, 그 와중에 당신들의 일상을 충실하게 이행하실 뿐이었다.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나를 살펴주시는 그 배려가 나는 퍽 다정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시댁에 내려온 다음날 내가 쓴 감사일기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1. 시댁에 내려와서 요양할 수 있게, 시골에 환경을 미리 준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 어렵고 무서운 시부모님이 아니라 다정한 분들을 만나게 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3. 편히 쉴 수 있는 나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댁에 적응한 지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근처에 있는 성주산 휴양림에서 쉬면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나 혼자 가기에 위험할 수 있다며 어머님이 동행해주시기로 했다. 그렇게 나와 어머님의 첫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그날은 조금 흐린 날이어서 가는 길에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졌지만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높은 나무가 우거진, 풀내음과 젖은 공기 냄새가 가득한 공간에 도착했다. 비가 와서 사람은 거의 우리 밖엔 없었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앉아 남편에 관한 이야기, 결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눴다. 술은 먹지 않았지만 차분한 공기와 부딪히는 나뭇잎 소리에 진솔한 대화가 술술 나왔다. 자연스럽게 내 입에서 "제가 온다고 했을 때, 뭔가 황당하거나 부담스럽진 않으셨어요?"라는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어머님의 첫마디가 잔잔했던 내 마음에 돌을 던졌다. "별로 그런 생각 안 했어. 네가 오죽 힘들었으면 내려온다고 했겠니. 요즘 애들은 시댁이라고 하면 질색을 하던데 대뜸 같이 살겠다고 하니 오히려 고마웠어." 그 말을 듣자마자 참을 새도 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딱히 말씀드린 적도 없는데, 혼자 꾹꾹 참아왔던 아프고 외롭고 고통스러웠던 마음을 이해받는 기분이었다.
"저는 사실 어머님이 당연히 부담스러워하실 줄 알았어요. 내심 가까이 지내면서 실망하실까 봐 걱정도 많이 했어요. 그치만 너무 힘들어서 반쯤 포기하는 심정으로 왔어요."
그 당시의 나는 머릿속에 '00는 00해야 한다.'라는 당위성이 가득 차있는 사람이었고, 그것은 며느리인 나에게도 당연히 적용되었다.
맏며느리는 참하고 조신하며 믿음직스러워야 한다. 빠릿빠릿하게 시어머니를 도우며 마음이 넓은 사람이어야 한다.라는 나만의 정의가 가득했다. 하지만 나는 그와 정확히 180도 다른 사람이었다.
"저는 어른들이 좋아하는 며느리상이랑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거든요. 막내라 애교는 많지만 조신하지도, 빠릿빠릿하지도 않잖아요. 덜렁대고 허당이라는 소리를 많이 듣기도 하고요. 심지어 원래도 체력이 없는데 병까지 얻어서 내려왔으니, 저를 겪어보시면 저절로 '에휴...' 하고 한숨 쉬지 않으실까 생각했어요." 나도 모르게 내비친 날것 그대로의 마음에 어머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왜 그렇게 생각했어? 나는 네가 우리 며느리가 되어서 정말 좋았는데. 나는 애교 많고 사랑스러운 며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나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네가 정말 좋은데. 완벽한 며느리라서 정말 감사한데?"
자율신경 실조증에 걸린 이후 나조차 나를 사랑스럽게 보지 않았더랬다.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내 몸이 미웠고, 상황을 이렇게까지 만든 것이 모두 내 탓 같아서 미웠다. 남편에게, 가족들에게 짐이 되는 것 같아 미웠다.
이 말씀을 듣고 한동안 계속 눈물이 나서 어머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항상 마음으로 간절히 듣고 싶었던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이해한다.'라는 말을 시댁에서 들을 줄이야.
비록 자율신경 실조증은 내 평범한 일상을 앗아갔지만, '덕분에' 인생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깊은 위로를 선물로 받는 시간을 선사해주었다. 이 날 피톤치드 덕분인지, 어머님의 위로 덕분인지 정말 오래간만에 4시간을 통으로 깊게 잘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