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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Nov 09. 2022

저는 슬플 때 고구마를 먹어요.

부정적 생각을 바꾼 나만의 방법(2)

그날은 처음으로 대학병원에 가는 날이었다. 것도 집에서 왕복 4시간 정도 걸리는, 알레르기로 유명하다는 의사가 있는 곳이었다.


어렵게 예약을 했지만 유일하게 가능한 날짜가 평일이었다. 남편은 마침  매일 야근하는 와중이었고, 그나마 한 줄기 희망이었던 아빠는 녹내장 수술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운전이 어려웠다. 그렇다고 엄마 혼자 대중교통을 타고 왕복 6시간을 고생시키기엔 차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나는 호기롭게 "까짓 거 혼자 가지 뭐!"라고 말했다. 사실 너무 먼 거리라 중간에 힘이 빠질까 걱정되긴 했지만 죽기야 하겠나 생각했다. 어차피 처음엔 검사를 하지 않고 간단하게 진료만 본다는 문자를 받아 괜찮겠거니 했다. 하지만 나는 간과했다. 대학병원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환자분 들어오세요."


영하 10도의 추위를 뚫고, 대중교통을 타고 2시간을 이동한 것만으로도 이미 상당히 지쳐있었다. 거의 40분을 기다려 만난 사람은 레지던트였다. 본 진료 전 미리 나의 상태를 묻기 위함이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A4용지에 빼곡히 써온 나의 증상과 상황을 말했고, 그는 열심히 쓰느라 바빴다. 분명 첫날엔 별 검사를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어째서인지 그 후로는 계속해서 기다림-검사-기다림의 반복이었다.


병원에서 있을 시간을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 예상했는데, 시간은 한없이 초과되고 있었다. 자율신경 실조증 때문에 조금만 무리해도 쉽게 기력이 빠지는 마당에, 큰 병원 안을 왔다 갔다 하며 2시간 넘게 검사를 받으니 점점 팔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내 마음도 점점 불안해졌다.


무려 4시간. 끝날쯤엔 이미 절인 배추가 되어버렸고, 검사를 하면서 내 손에 쥐어진 수많은 프린트와 수납지들의 무게조차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검사가 끝나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하... 그냥 누구 한 명 데려 올걸.'


에너지가 빠져 몸이 차가워지고 힘이 빠질까 봐 비상시를 대비해 챙겨 온 밥 2-3숟가락과 유일한 간식인 고구마 반개로 일단 에너지를 보충해야 해서 병원 밖으로 나가 벤치에 앉았다. 빨갛게 언 손으로 맨밥과 고구마를 꾸역꾸역 먹었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2시간을 더 가야만 했고, 하필 퇴근시간이었다. 덜덜 떨리는 몸으로 2시간을, 정말 살아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버티며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할 즈음엔 면역이 바닥나버려 온몸이 간지럽고 거의 헛구역질을 했다. 아파트에 내리니 갑자기 서러움이 몰려와 눈물이 핑-돌았다. 눈물과 함께 자기 연민이 습관처럼 재빠르게 치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역시나 무리였어. 그냥 무리해서라도 남편이나 엄마를 끌고 왔어야 하는 건데. 자칫하면 길바닥에서 주저앉을 뻔했어. 오늘 나는 보호받지 못했어.'


분명 머리로는 모두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알고 있는데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지쳤던 오늘 하루가, 추운 날 병원 밖에서 혼자 언 손을 부여잡고 불쌍하게 고구마를 꾸역꾸역 먹던 초라한 내 모습이 자꾸만 리플레이되었다. ‘밖에서 뭐라도 먹을 수 있었다면…’ 희귀 알레르기로 무엇 하나 마음껏 먹을 수 없는 내 현실을 자각하곤 또다시 마음이 무너졌다.


하지만, 곧이어 나는 연습한 대로 나에게 물었다. '아 거지같이 힘든 하루였다. 너무 지쳐서 기분이 우울하고 슬프네? 고생한 나에게 뭘 해줘야 하지? 어떻게 해야 내 기분이 좋아질까?'


"그동안 못 먹었던 달콤한 고구마랑 연어나 왕창 먹고, 엄청 웃긴 예능을 보면서 스트레스를 풀어버리자!"


장누수 증후군 때문에 조절하느라 매번 반개씩 먹던 고구마를 2개나 먹고, 밥도 가득 먹어 볼록해진 배를 탕 탕치며 일부러 웃긴 예능을 찾았다. 깔깔깔 한바탕 웃어대니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먹구름처럼 마음에 드리웠던 자기 연민이 어느새 안개처럼 사라졌다.


만세-! 처음으로 과한 우울과 불평에 빠지지 않고 무사히 넘어갔다.


30년간 나의 신체의 일부인 것처럼 달라붙어있던 불평과 과하게 많은 생각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느낌은 너무나 상쾌했다. 이제껏 나는 부정적인 상황에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이를 강하게 표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30년간 불평 종자였던 내가, 상황이 거지 같아도 스스로의 생각으로 긍정을 할 수 있었다니! 나도 이런 면을 키울 수 있었다니! 내 마음이 자기 효능감으로부터 오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이 날 나는 전쟁에서 승리한 군사처럼 기념비를 세우는 마음으로 감사일기를 썼다.

 



이제는 안다. 100% 긍정적인 상황도 100% 부정적인 상황도 없다는 사실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스트레스 상황을 마주해야만 하는 것이 인생이고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불평과 부정적 감정이 들순 있어도 그것에 속절없이 빠지지 않으리라 결정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감정은 생각의 영향을 받으며 잘 다룰 수 있는 근력이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충분히 그럴 힘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그래서 오늘도 나는 말한다. "에라, 모르겠다! 고구마나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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